'안풍'실세 놓고 생존게임, 총선 염두에 둔 정치적 포석 시각도

한나라당 'YS 밟기', 왜?
'안풍'실세 놓고 생존게임, 총선 염두에 둔 정치적 포석 시각도

3년 가까이 정치권 ‘빅뱅’의 뇌관이 돼온 ‘안풍’(安風, 국가안전기획부 예산의 선거자금 전용 의혹)이 마침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동안 풍문으로 떠돌던 ‘안풍’은 9월 23일 서울지법 형사23부(재판장 이대경)가 김영삼 전 대통령(YS) 시절 신한국당 사무총장이던 강삼재 의원과 안기부 운영차장을 지낸 김기섭씨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실체’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강삼재 의원 등이 안기부 예산을 특수 활동비 명목으로 인출해 차명 계좌에 넣어 세탁한 뒤 1996년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총선 때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점이 인정된다”며 강 의원에게는 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 김씨에게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2년, 그리고 추징금 125억원을 선고했다.

강 의원은 1심 판결에 대해 “안기부 예산을 당 자금으로 쓴 적이 없다”며 즉시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다음날 지역구인 경남 마산에서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안풍의 뇌관은 강 의원의 사퇴 후 더욱 가열되고 있다. 선거 때 유용한 안기부 자금의 실체(성격)에 따라 한나라당의 도덕성은 물론 내년 4월 총선 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나라, YS 고해성사 요구

문제의 ‘안기부 자금’은 2000년 2월 경부고속철도 로비 자금을 수사하던 중 그 해 7월 경남종금에서 한나라당 강삼재 부총재의 차명계좌 2개에 입금돼 있던 정체 불명의 뭉칫돈을 발견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은 돈 흐름을 역추적한 결과 안기부 모 계좌에 이르렀고 여기서 국고수표(해당 부처에서 발행한 예산 집행에 쓰이는 수표)로 나온 돈이 세탁을 거쳐 96년 4·11 총선과 95년 6·27 지방선거 직전 구 여당에 유입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 자료를 토대로 이듬해 1월3일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을 소환,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또 안기부 예산 1,197억원 중 상당액이 96년 총선과 95년 지방선거 때 구여당의 입후보자 등 모두 185명에 전달된 사실이 드러나자 검찰은 2001년 1월23일 당시 사무총장을 지낸 강 부총재를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공판과정에서 “1,197억원 모두 안기부 예산”이라고 주장했지만 1심 재판부는 “1,197억원 중 사용한 856억원만 안기부 예산”이라고 결론지었다. 구 여당이 선거 때 사용한 자금이 ‘안기부 예산’이란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 셈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YS측과 한나라당은 한결같이 ‘안기부 자금설’을 부인하고 있다. 강삼재 의원과 YS측은 “선거 때 쓴 돈은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당의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시 선거자금은 YS의 대선잔금”이라며 YS의 ‘고해성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안풍’은 내년 총선까지 2심. 3심 재판이 예정돼 있어 어떤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 총선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이 1심 결과를 뒤집지 못할 경우 간첩을 잡아라고 준 돈(국고ㆍ國庫)를 사사로이 선거에 이용한 ‘부도덕한 정당’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 한나라당 소장파가 YS측에게 ‘대선 잔금’임을 고백하라고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심 재판이 유지될 경우 국가가 한나라당을 상대로 제기한 940억원의 국고환수 민사소송에서 한나라당은 패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 한나라당은 당 재산 전부를 국가에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급기야 한나라당이 최병렬 대표까지 나서 “돈의 출처와 성격에 대해 최소 5-6명의 당 밖 인사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면서 YS를 압박하기도 했다.

홍준표 의원은 9월 25일 “안기부 자금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92년 대선잔금”이라며 직접 YS를 겨냥했다. 사실상 한나라당과 YS측이 ‘생존게임’에 들어간 것이다.


정치권, YS 대선 잔금에 무게

‘안풍’과 실체와 관련, 정가는 그 돈이 YS의 대선잔금이遮?쪽에 무게가 두는 분위기다. 실제로 YS는 2001년 2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92년 대선 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에 안기부 돈을 받느냐”고 말해 그런 (대선잔금)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2001년 1월말 안기부 자금문제를 담판짓기 위해 이 전 총재가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갔을 때 YS는 ‘안기부 예산이 아니다. 재벌들이 지원한 정치자금’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가에서는 YS가 집권 초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안받겠다고 선언하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만큼 국가 예산을 빼내 선거에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최 대표가 언급한 ‘당 밖의 5~6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YS의 차남 김현철씨,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홍인길 전 총무수석, 권영해 전 안기부장, 김기섭 전 차장 등이 그들이다. 이가운데 현철씨는 ‘소통령’으로, 이원종 전수석은 청와대에서 ‘부통령’으로 통할 만큼 실세였다는 점에서 의혹을 받고 있다.

특히 현철씨는 대기업 간부이던 김 전 차장을 안기부로 스카우트해 92년 대선 사조직인 ‘나사본’의 자금 130억원 중 70억원을 안기부 계좌를 통해 세탁한 뒤 96년 총선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이라면 홍준표 의원 주장대로 YS 대선 잔금이 안기부 계좌를 통해 자금 세탁 및 관리 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그 돈에 대통령 당선 축하금까지 포함돼 있다면 특가법상 뇌물수수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YS측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YS측은 한나라당의 ‘안풍’ 압박에 대해 함구로 피해가고 있다. 상도동의 한 관계자는 “YS는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회창 후보를 공식 지지했는데 안기부 정치자금 사건과 현철씨 공천 문제 등에서 한나라당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내년 총선서 노무현 신당이 공략 목표로 삼고 있는 PK(부산.경남) 지역을 지키기 위해 YS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최 대표를 비롯한 당내 주류는 한나라당이 살기 위해서는 YS와의 단절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정치적 부활을 꿈꾸는 YS 부자는 ‘안풍’이란 암초를 만나 한나라당으로부터도 외면을 받고 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3-10-10 11:51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