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문화코드로 등장한 마술, 신비한 매력의 환상체험
세상이 신나는 마술에 걸렸대요 생활 속 문화코드로 등장한 마술, 신비한 매력의 환상체험
스트레이트 재킷(정신병원 등에서 환자의 난동을 방지하기 위해 입히는 옷)을 입어 손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한 젊은 남자가 크레인에 매달려 10m 상공까지 올라간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60초. 이 시간 안에 옷을 벗고 탈출하지 못하면 수심 5m의 물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의 발에는 30kg의 쇳덩이도 묶여 있다. 인기 댄스그룹 ‘쿨’이 최근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고공 탈출’ 마술의 내용이다. 코너 명은 매직스 쿨(Magic’s Cool). 9월 6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제목처럼 매주 한 번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마법을 건다. 요즘 10~20대 사이에 뜨고 있는 ‘개인기’는 바로 마술이다.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던 ‘마술’은 근래 들어 TV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한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에 나간 남자 스타가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내놓은 비장의 무기도 ‘마술’이었다. 가수 세븐은 동전을 감추거나 카드를 이용한 각종 마술 기술을 자랑하며 ‘마술 소년’ 이미지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한 술 더 떠 아예 가요 무대에서 ‘마술 쇼’를 연출하는 가수도 등장했다. ‘마법의 사랑’이라는 데뷔 앨범을 발표한 신인 가수 소리다. 손에서 불이 나오는 ‘불쇼’, 철창 속에서 돌연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증발쇼’ 등 다양한 마술로 무대를 휘어잡는다. 단순히 TV 프로그램에서만 마술을 펼치는 게 아니다. 지난해 조앤 롤링의 소설과 이를 영화로 만든 ‘해리 포터’가 세계적으로 마술 붐을 일으킨 후, 영화ㆍ연극ㆍ출판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마술은 없어서는 안 될 문화 코드로 급속 확산되고 있다. 영화 ‘남남북녀’의 주인공 철수(조인성 분)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마술로 유혹하는 바람둥이 대학생으로 눈길을 끌었다. 처음 만난 이성에게 마술을 부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는 ‘작업’ 수단의 한 전형을 보여줬다. 극단 ‘마야 씨어터’가 10월 15일 제 3회 세계 지식 포럼 개막식 만찬에서 첫 선을 보이는 연극 ‘샤론의 장미’는 고대 신라 여왕인 ‘선덕여왕’의 이야기에 마법이라는 판타지를 섞어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 한국의 고대 신화를 전세계인들과 공감하기 위한 마술 퍼포먼스다. 꽃을 이용한 환상적인 마술을 빌린 피날레가 압권이라는 전언. 이러한 마술 열기는 대중문화계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은결 등 젊은 마술사들이 유명 연예인처럼 유명해지고, 마술캠프, 마술교실도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다. 심지어 마술에 대해 보수적이던 학문과 교사 사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직 교사들이 “마술의 효과를 교육에 활용한다”며 인터넷에 만든 모임인 ‘교사마술동호회(cafe.daum.net/MagicTeacher)’의 경우 동호인만 1,500 여 명. 매달 열리는 정기 연수에 100명 가까운 교사들이 참여한다. 회장인 인천 신광초교 박태현 교사는 “마술은 학습에 대한 동기 유발의 효과적인 수단”이라며 “어린 학생들에게 마술 공연을 보여주면서 상상력을 키워주고 과학적 원리에 대한 흥미를 북돋운다”고 전했다. 이 같은 마술 붐에 대한 폭넓은 관심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술을 전문적으로 가리키는 마술학원도 수강생들로 북적댄다. 9월 30일 오후 서울 강남의 마술 아카데미 ‘마술나라’에는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되는 마술 수업을 듣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다. 그 중에는 앳된 얼굴의 초등학생도 있었다. 이날 수업은 카드를 이용한 마술. 수업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강의를 하는 마술사의 손동작,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정면을 응시한다. 그들은 마술사가 노련한 끼를 발산하며 화려한 손동작과 재치 있는 멘트를 던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카드의 기본은 뽑는 거예요. 천천히 뽑아 주세요.” 한 남학생이 카드를 뽑기 위해 손을 내밀자 마술사의 재기 발랄한 입담이 이어진다. “발 말고 손이라니까요. 손. 신성한 카드를 발로 만지면 안 되죠.” 웃음을 주는 멘트와 동작을 익히는 것도 중요한 마술 교육의 일부다. 이 곳에서는 주 2회 수업에 한 달 20가지 이상을 배울 수 있다. “학교 행사에서 펼칠 장기를 준비하는데, 마술을 보여주면 다들 대단히 좋아할 겁니다.” 지난달 말부터 마술 수업을 듣고 있는 최영훈(23)씨의 말이다. 모델 지망생인 혜원(20)씨 역시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신기한 기술을 익힌다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마술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확 ‘튀게’ 알릴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러한 마술 붐에 대해 평론가 김동식씨는 “현대 사회에서는 그 유혹의 대상이 이성이든 대중이든 간에 많은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는 건, 일종의 권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다”며 “동전이나 카드 같은 작은 소지품 하나로도 자기를 어필하고 상대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신비한 매력에 끌리는 심리”라고 해석했다. 한편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최근의 불어 닥친 마술의 인기가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진단했다. 황 교수는 “인터넷과 온라인 게임의 발달로 가상과 현실 세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신화’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판타지’나 ‘미신’을 재미있는 놀이의 코드로 여기면서 이러한 환상을 실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으로 보야한다는 지적이다. 영국 낭만파 시인 키츠의 “환상이 논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입력시간 : 2003-10-1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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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