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평생 직장 "더 늦기 전에…" 명퇴바람

[명퇴… 97년, 그리고 2003년] 가을 悲歌 '명퇴'
무너진 평생 직장 "더 늦기 전에…" 명퇴바람

때아닌 삭풍 몰아치는 가을이 예고도 없이 찾아 왔다. 명예 퇴직의 칼바람에 샐러리맨들은 벙어리 냉가슴이다. 더 이상 파고들 곳 없는 코트깃만 더욱 세워 볼 뿐.

“매년 가을을 떠나 보내면서 이젠 스스로 떠날 때가 다가 오고 있음을 예감했었다. 지난해 낙엽을 밟으며 한 숨 속에 마음을 다잡던 기억이 난다. (회사를) 떠날 때를 알고 스스럼 없이 뒤돌아서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1년이 고비가 될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곱씹었다. 노ㆍ사 모두가 지쳐버린 파업 투쟁의 격랑을 겪으면서, 세월은 역류하듯 계절을 휘감으며 한 바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또, 가을이 올 줄은 몰랐다. 낙엽이 채 지기도 전 가을보다 내가 먼저 떠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후회해서가 아니다. 숫제 시원섭섭하다.

다만 15년간 같이 일해온 정겨운 얼굴들이 눈 앞을 가려 잠시 눈시울을 붉힌다. 하지만 인생은 어느 가을 오후의 느낌처럼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것이란다. 나 역시 그 기억 속에 그저 매몰돼 버리고 마는 것인가.”(박희원)


"밀려나느니" 비장…두산중공업

경남 창원 귀곡동에 위치한 두산중공업은 10월 가을 비에 흠뻑 젖은 듯 무겁게 가라 앉아 있다. 연초 몰아치던 노조의 파업 열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회사 곳곳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명퇴’ 회오리 바람에 모두들 잔뜩 긴장한 채 ‘고(Go)’냐 ‘스톱(Stop)’이냐의 갈림길에서 누구랄 것 없이 심한 중압감에 휩싸여 있다.

15년간 기획실과 인사ㆍ교육팀 등에서 근무해온 박희원(40) TMS(인력개발)팀 차장은 지난 주 과장급 이상 관리직을 대상으로 실시된 명예 퇴직 신청 접수 데스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부장을 비롯 주변에서는 이를 만류했지만 박 차장은 ‘스스로 돌아설 때’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회사 주인이 바뀌면서 나름대로 경영 혁신의 기치 아래 열심히 뛰어 보려고 애도 많이 썼어요. 하지만 저에게 남는 것이라곤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군요. 더 늦기 전에 제 갈 길을 이젠 찾아야 겠다는 생각에 희망 퇴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군데 군데 탄식과 함께 전화선을 타고 온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17년 경력의 송준재(43) 홍보실 과장 역시 ‘사오정(45세 정년)’을 눈앞에 두고 올 가을 희망 퇴직서를 제출했다. 40세를 넘기면서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샐러리맨의 불안감을 이젠 훌훌 떨쳐 버리고 싶어서다. 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떠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38선(38세 명퇴 선택)’을 넘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새겨왔던 결심들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진 것 뿐이었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더 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에.

두산중공업은 10월 4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과장급 이상에 대해 명예 퇴직 신청서를 접수한 결과, 365명이 자발적인 ‘명퇴’를 희망했다. 놀라운 것은 전체 희망 퇴직자 중 45세 미만이 150명으로, 무려 41%가 한창 일해야 할 시기에 ‘명예로운 퇴직’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40세 미만 역시 전체의 19%(65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 같은 조기 퇴직붐은 평생 직장이 사라진 이후 사회 전반에 배어있는 샐러리맨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외환 위기 이후 최대의 고비라고 할 만큼 침체된 경기 상황, 기업의 채산성 악화에 따른 열악한 직장 환경, 치열해지는 사내 경쟁과 경직된 회사 분위기 등 날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는 40대 가장들의 삶은 더 이상 명예롭지 못하다.

올 가을,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스스로 무엇인가 대비해야 하는 다급함이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다.

두산중공업은 과장급 이상 관리직에 이어 대리 이하 사무ㆍ기술직 직원들까지 확대해 명예 퇴직을 신청 받기 위해 노조측과 현재 협의중이다. 기술직에 근무하는 40대 초반의 한 직원은 “아직 전직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2년 치 연봉 지급과 3년간 학자금 전액 지원과 같은 괜찮은 조건이 앞으로 다시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명퇴’를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고민했다.

창업을 꿈꾸며 이를 준비중인 또 다른 직원은 “아무리 조건이 좋다지만 지금같이 최악의 경기 상황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며 “내년까지는 적(籍)을 걸어 놓고 경기를 살펴가며 전직 플랜을 착실히 밟아가는 것이 나은 것 같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두산중공업에는 45세 이상 대리 이하 사무ㆍ기술직 직원이 1,500여명에 달한다. 또 한 차례의 ‘명퇴 바람’이 불어 닥칠 두산중공업은 폭풍전야다. 뒤숭숭한 분위기만이 감돈다.


이 기회에 탈 샐러리맨…KT

10월 1일자로 5,505명이 대거 명예 퇴직한 KT는 ‘명퇴’ 후유증으로 회사 전체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떠난 사람은 떠났다고 치더라도 남아있는 사람들로서는 앞으로 몰아칠 ‘후 폭풍’을 우려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5,505명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보면 무너진 평생 직장이 실감 난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다.

몇몇 부서들은 빠져나간 사람을 대신할 충원자가 없어 퇴근 시간이 평균 2시간 정도는 늦어질 정도다. 떠난 동료들의 뒷모습을 돌이키며 심적 갈등을 겪고 있는 일부 40대 직원들은 ‘이번 명퇴조치 이후에는 명예롭게 나갈 기회가 앞으로는 없는 것은 아닌지’, 말은 하지 않아도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다. 정리해고는 물론 인사고과 불이익, 비연고지 전출, 한직 발령대상 등 돌출성 위험 요소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KT 인력관리실의 한 관계자는 “3년 정도 회사를 더 다니며 모을 수 있는 돈을 받고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을 쭉 지켜 보면서, 앞으로 해고와 고용이 더 자유로워져 이 정도의 퇴직금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닐지 우려감이 절로 생긴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또 인사관리실 관계자는 “‘명퇴 바람’이후 회사 전체에 허탈감이 만연해 있다”며 “남은 직원들의 마음을 잡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KT의 ‘전직 지원 휴직제’ 프로그램에는 퇴직한 200여명에 달하는 예비 창업자나 재취업 희망자들이 재교육을 받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퇴직을 한 전직 사원들을 대상으로 6개월동안 재취업ㆍ창업 컨설팅과 각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황관수 KT인사지원 부장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퇴직자들은 신규 창업이나 재취업을 계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창업의 경우는 KT 연관사업과 관련 상품판매 활동에 나서거나, 재취업의 경우에는 보안업체 등 협력업체로 이직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변리사나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180도 다른 분야로 전직하는 경우도 많다.

KT 기획실에서 신사업을 담당하다 이번 기회에 희망 퇴직한 이모(33)씨는 “언제 회사를 그만두게 될 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기 보다, 자격증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영업을 선택하겠다”며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변리사와 같은 자격증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계획자 사업부에 근무하다 12년 만에 퇴직한 홍모(33)씨도 전문 요리사가 되기 위해 이번 퇴직 행렬에 동참했다. 인력관리실에 근무해온 김 모과장은 퇴직 이후를 오래 전부터 준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올 가을 명예 퇴직의 길을 택했다. 탈(脫) 샐러리맨 욕구에 쫓기듯 자발적으로 퇴직한 ‘삼말사초(30대말~40대초)’ 직원은 총 532명으로 이번 전체 명퇴자 중 약 10%를 차지한다.


'칼바람' 사정권 안에…금융권

가을이 깊어 가면 갈수록,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권의 구조 조정 바람도 거세질 전망이다.

가계대출 부실로 고전하고 있는 은행권에서는 외환ㆍ한미은행에 이어 우리은행이 10월 10일부터 퇴직 희망자들의 신청서 접수에 들어 갔다. 부부장 이상, 부지점장 이상 전직원이 대상으로 4급 과장ㆍ차장급의 경우 12년차 이상(만 42세 이상), 5급 대리급은 11년차 이상(만 38세 이상)으로 월 평균임금의 18개월치를 지급키로 했다.

국민은행 역시 영업 실적이 부진한 122개 점포를 폐쇄키로 하고 11월 이후 희망 퇴직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대규모의 구조 조정 태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어서 은행권 전체가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분위기다.

증권업계도 연말을 앞두고 ‘칼바람’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올들어 증권사들의 명예퇴직자 수는 534명으로, 이미 지난해 한해의 명퇴자(321명)을 크게 넘어섰다는 진단이다. 최근의 긴축경영 기조가 유지된다면 올 연말까지 2001년의 567명 보다 훨씬 많은 직원들이 명퇴 대열에 나설 것으로 증권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이와 함께 기업 인수 합병(M&A)시장에 매물로 나온 증권사가 10여 개에 달한다는 소문마저 나돌아, 증권사 차원의 구조조정 흐름 또한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박민구 한국사업정보개발원 기획관리팀장은 “과거 IMF때는 명예 퇴직한 사람 10명 중 8~9명이 프렌차이스 등 창업에 나섰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며 “창업을 하더라도 최소한 3개월 이상 1,2개 종목을 집중 연구, 창업계획을 탄탄히 세운 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박 팀장은 “지금과 같은 불경기라면 당분간은 ‘돈 많이 벌겠다’는 기대는 접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 2003-10-16 13:25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