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한국학 산책의 길잡이

[석학에게 듣는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
낭만적인 한국학 산책의 길잡이

퇴근 차량으로 한창 밀리는 10월 8일 오후 6시, 유홍준 선생은 차를 열심히 몰고 있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선생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고 목소리가 올라가더니, 말투가 경상도 어투로 돌변한다. 명지대에 있는 자신의 도서관 수졸당 문고에서 부랴부랴 2,500원 짜리 자장면 하나를 시켜 맛있게 먹고 나온 터다.

“서울 안 오나? 전화 좀 하지.” 영남대 영문과 90학번이지만, 자신의 강의를 듣고 미술사학과 대학원으로 옮긴 뒤, 지금은 김천 직지사 성보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어느 제자다. 10월 30일 과 학생들과 함께 경주로 답사 가는 길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덮개를 닫는 선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까지 1년에 적어도 두차례, 100번은 넘게 갔지만 또 가고 싶은 곳이다.

그렇게 그와 우리의 산하는 하나가 됐다. 우리의 산하는 완상의 대상이 아니라, 무수한 사연을 감춘 채 말을 거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다. 유홍준(58ㆍ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선생은 애정과 정밀의 시선으로 우리땅을 읽어 낸 길 위의 선비다.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저술가.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길이다.


우리 땅을 읽어낸 길 위의 선비

수졸. 바둑 초단(守拙)을 목표로 한다는 애기가의 목표가 서린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노자의 한 구절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다. 시대의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 하고 우직한 태도를 고집한다는 뜻이다. 역시 선생을 일컫는 말이다.

11년 동안 영남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있다, 2002년 3월 명지대로 옮기면서 한국문화유산자료실과 함께 갖게 된 선생의 문고 이름이기도 하다.

미술사도록, 문집류, 철학ㆍ사상, 문화재 답사 자료, 사회 과학 등 소장 도서 1만여권이 30평의 방에 10개 항목으로 촘촘히 분류돼 있다. 천정까지 닿는 서책들은 ‘학문의 완성은 분류학’이라는 대명제를 새삼 확인하게 한다. 2001년 명지대가 미술사학과를 신설한 것이 선생을 데려 오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한국인이라면 선생을 모를 수가 없게 돼 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월출산과 남도의 봄’이 바로 선생의 글이기 때문.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무위사 극락보전(無爲寺 極樂寶殿)편에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발품을 아끼지 않는 선생의 학문적 방법론은 물론, 국토에 대한 지순한 사랑이 빚어 올린 걸작이다. 19차례 심의를 거쳐야 비로소 글이 실리는 국정 교과서에 간택됐다는 통보를 받고 선생도 정성을 들여 다시 퇴고한 글이다.

1993년 첫 책이 빛을 보고 1996년 마지막 작품이 나와, 3부작 신드롬을 마감하기까지 책은 이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언어의 그물망을 통해 입증했다. 답사란 가장 현장적인, 그러므로 가장 반(反)사이버 문명적인 공부 방법이다. 키워드 쳐 놓고 엔터키 누르면 뚝딱 끝나는 이 시대에 선생은 통쾌하게 죽비를 후려친 셈이다.

‘신문 명칼럼 컬렉션(1995ㆍ문이당刊)’에 수록돼 있는 선생의 문장들은 답사기에 실린 글은 즉흥적 감흥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한 논리의 수련을 거친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족하다. 9월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하는 제 18회 만해문학상에서 근간 ‘완당평전’(학고재刊)이 선정됐던 일은 그 연장선상이다. 12번째 저서로 선생은 만해 문학상 사상 처음으로 학자가 상을 탄 선례를 이뤘다. 우보(牛步)를 마다 않은 선생의 시간들은 우리 시대에 많?이야기를 들려 준다.


타고난 반골기질, 그리고 13년만의 졸업

그는 ‘깡패 학교’로 불리던 서울 중동고 출신이다. 8년 위의 김지하, 4년 위의 송두율 등이 그의 선배다. 바로 그 반골 기질 덕을 그는 톡톡히 보았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들어 갔으나 2년 뒤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다 무기 정학을 당했다. 제때 졸업을 못 해 1971년 입대, 3년 뒤 복학한 그에게 민청학련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태ㆍ이철 등과 친구 사이였던 그에게 긴급조치 4호의 멍에가 씌워지더니 영등포 교도소행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복학불가 방침으로 대응했다.

그가 복학했던 것은 1980년 3월, 졸업은 그 해 10월. 13년만의 졸업이다. 1979년 10ㆍ26 쿠데타 덕분이었다. 그 동안 그는 문사로서의 칼을 잔뜩 벼리고 있었다. 형집행정지가 떨어진 1975년 2월 풀려 나온 후 넉달만에 금성출판사에, 76년 공간잡지사에, 78년 ‘계간 미술’에서 미술 기자로 활동한 세월이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첫 평론 ‘묵로 이용우론’이 당선돼 정식 등단한 그는 그해 3월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에의 여한을 풀었다. 그리고 1984년, 건국대 교수 채용에 통과하는가 싶더니, 하루도 채 되기 전 취소 통보를 받았다. 형집행 정지이나, 사면ㆍ복권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1985년, 선생은 민미협 창설로 울분을 대신했다. ‘한국근대사 시리즈’의 신학철, ‘들불’의 임옥상, ‘농사꾼 김씨’ 의 김정헌 등 쟁쟁한 민중미술 진영의 이론적 무장 직업을 선도했다. 신촌의 ‘우리마당’과 대구의 ‘예술마당 솔’ 등지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한국미술사를 강의하면서 선생은 답사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절감했다.

1991년 9월 영남대 김윤수 교수로부터 온 전갈은 오랜 가뭄끝의 단비였다. “유군, 우리 대학이 교수를 공채하는데 서류를 내게.” 감지덕지. 그렇게 하부구조가 갖춰지고 나자, 1993년부터 진짜 장정이 펼쳐졌다.

원래, 답사기는 1990년 ‘사회평론’지에 연재돼 첫선을 보인 것. 대학 동기인 가톨릭대 안병욱 교수의 부탁을 받고 고료 없이 싣던 글이었다. “열 건 연재하고 나니, 돈이 없어 폐간되고 말았죠.” 이어 월간 ‘길’로 옮겨 5회 연재됐다. 그런데 첫회가 실리고 나자 창작과비평사의 서울대 영문과 백낙청 교수가 전화를 걸어 왔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내자며 침을 발라 두더군요”. 큰 격려였다.

답사는 1998년 북한으로 이어져 2001년까지 ‘나의 북한 문화 유산 답사기’(중앙 M&B)두권으로 이어졌다. 평양 개성 묘향산 등 북한 일대를 두 차례 둘러 보고 쓴 책이다. “스타킹을 선물하니 ‘살양말’이라며 고마워 하더군요. 다들 북한의 명시 서너개씩은 다 외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 동안 본의 아니게 소홀했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2000년 이후 선생은 본령의 작업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2001년 ‘화인열전’(역사비평), 2003년 ‘완당평전’(학고재)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일련의 저작물이 그 증표다.

1989년부터 겸재 단원 등 조선시대의 거장들을 주제로 ‘역사비평’에 연재해 온 글을 모은 것. “자기는 감추되 사물의 진실성을 드러내고, 혼자서만 아는 석학이 아니라 아는 것을 사회화해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은 영원한 사표죠.” 김정희의 삶, 예술, 학문을 책으로 엮어 낸 ‘완당평전’이 가장 애착이 가는 연유다.


이시대에 문사는 있는가?

책은 또 오래 전 자신과 했던 약속의 완성이었다. 선생은 1988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입학, 예술철학을 탐구했던 적 있다. 당시 추사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쓰던 그는 보다 정교한 논증이 필요한 부분에 이르러 ‘완당평전’을 써서 바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다면 선생은 최근 영화 ‘취화선’은 어떻게 봤을까? “손재주 뛰어난 장인이었을 뿐인 장승업의 참모습이 아니라, 후세의 윤색뿐이더군요.” 선생이 앞으로 오원의 평전 저술에 착수하려는 것은 학자적 양심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20년째 한문의 대가인 이광호 교수(연세대 철학과) 등으로부터 옛 서한집 영인본인 ‘고간찰(古簡札)’ 등을 연구하는 것은 역사의 폭력을 경계하는 학자적 양심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양심은 ‘까마귀 우는 골에는 가지 않는 백로’식의 행보를 거부했다. “왜 인문학의 위기가 왔겠어요?” 자기 전공을 ?P까지 견지하면서 유려한 글쓰기로 대중의 갈증을 풀어준 학자(더 정확히는 문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저널리즘적 균형 감각을 강조한 선생이 최근 사흘 꼬박 읽은 책은 김지하의 세권짜리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이다. “그도, 나도, 당대 사회도 모두 보였어요.”

온 강토가 선생의 텍스트이듯, 가끔 나가는 바다 바깥에서도 선생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영국 갔다 런던 노팅힐 벼룩 시장을 들러 사왔楮? 동해가 ‘Sea of Korea’ 로 표기돼 있길래.” 1790년 영국서 만든 아시아 지도 역시 그의 자료실에서 안착할 곳을 찾았다. 거기서도 선생은 6척 장신에 옷자락을 휘휘 내저으며 우리의 유산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10월 25일 개관 1주년을 맞는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박수근 미술관 사업에도 관계한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서민의 삶을 가장 진솔하게 그렸던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처음으로 가시화되는 거죠.” 비상근 명예 관장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자리다. 선생의 본령이 미술평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10월 8일 퇴근길 러시 아워 한복판, 선생은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명지대 부설 특수 야간 대학원인 ‘명지대 문화 예술 대학원’에서 7시부터 3시간 동안 이어지는 강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테마는 ‘고구려 고분 벽화’였다.

선생이 ‘세한도’보다 더 아끼는 완당의 것이 있다.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는 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보다 적극적이죠. 가장 맛 있는 말이예요.” 역동성이 훨씬 더 하다. 그렇게, 이 시대 한국인 또한 선생이 그려 놓은 지도를 따라 ‘낭만적인 한국학 산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0-16 14:34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