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즈 뉴웨이브 주도할 재목

[재즈 프레소] 손성제, 6년만의 귀향
한국재즈 뉴웨이브 주도할 재목

“설사 미국의 1급 재즈맨과 똑 같이 연주한다 해도, 미국인들이 보면 웃길 거예요. 모창 대회도 아닌 터에.”그의 첫 앨범 ‘누보 송(Nouveau Son)’은 그 같은 자의식의 산물일 것이다. 똑 같이 해서는 아무리 잘해봤자 아류 소리밖에 못 드는 재즈의 속성을 본고장에서 체감하고 온 덕이다. ‘새 소리(New Sound)’라는 뜻의 불어다.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1달만에 발표한 앨범에 재즈팬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손성제(33). 국내에는 낯설 수 밖에 없다. 재즈 유학 6년을 마치고 막 돌아 왔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작품은 앞으로 예의주시 해야 할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절로 드러난다. 이주한(트럼펫) 임미정(피아노) 등 함께 한 뮤지션들 모두가 현재 한국 재즈의 새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이라, 소장 가치를 더 한다.

앨범은 21세기 한국판 재즈 스탠더드다. ‘춘천 가는 기차’, ‘거리에서’, ‘매일 그대와’ 등 2월부터 석 달 동안 인터넷과 길거리 투표를 통해 가장 한국적인 스탠더드 가요로 뽑힌 14곡이 재즈화했다.

“미국의 스탠더드만 모방해야 하는 것이 싫어 내가 1980~90년대에 좋아했던 국내 가요에 재즈의 숨결을 불어 넣고 싶었다.” 불어로 이름 붙인 데서도 짐작 가듯, 수록곡들은 샹송 뺨칠 만큼 서정이 짙고 감미롭다. 영어 가사는 묘한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데 한몫 단단히 한다. 4월부터 두 달 동안 작업한 결과다. 6년 동안 정통으로 재즈를 배우고 왔다는 자신감이 곳곳에서 묻어 난다.

보스턴 버클리(Berklee) 음대생 최고의 영예인 ‘쿰 라우데’상 수상, 뉴욕 퀸즈칼리지 대학원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색소폰 석사 학위 수여. 독특한 이력 가운데 맨 앞에 위치하는 영광의 기록들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는 클래식에서 재즈까지 이르는 여정을 거쳐야 했다.

클래식 레코드 수집가였던 부친의 뜻에 따라 그는 5살부터 피아노 레슨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엄하기만 한 피아노 선생이 실어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던 그는 초등학교때 악기를 클라리넷으로 바꾸더니 서울예고와 연세대(90학번) 작곡과를 거쳤다. 때마침 대학서는 재즈붐이 거셌다. 사회 일반에서도 재즈 바람이 막 불던 때였다. 그는 동기들과 허름한 방에서 카시오페아, 데이비드 샌본 등의 퓨전 재즈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재즈에 빠져들던 2학년 때, 그는 낙원상가에서 허름한 대만제 소프라노 색소폰을 구입해 독학으로 떼냈다. 주변에서는 왜 술집 음악을 하느냐며 재즈에 빠진 자신을 못마땅해 했으나, 그를 이해하던 아버지는 악기점에 가서 색소폰의 명품인 셀마를 사다 주었다. 재즈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며 유학을 제안했을 때도 찬성해 주던 부친은 하필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 세상을 떴다. 그가 재즈에 악착같이 매달렸던 이유다.

서빙이나 배달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그에게 미국 특유의 살벌한 실력제일주의 풍토는 이를 악 물게 만들었다. 3학년때 시내 한 클럽에 나가 무급으로 연주하던 그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40~50 달러를 받는 연주자가 됐다.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한가? 이정식의 표현에 따르면 “재즈 아닌 재즈, 재즈 없는 재즈”가 판을 치는 한국처럼, 그곳도 달콤하고 보수적인 재즈가 득세하고 있었다. “파티에 가서 프랑크 시나트라 같은 옛날 스탠더드를 연주해 주면 진짜 클럽보다 몇 배의 보수를 받았어요.”

그렇게 대학 4년을 마친 그는 뉴욕의 재즈 명문인 퀸즈 칼리지의 대학원 과정에 입학해 1년 6개월 동안 더 공부했다. 거기서 그는 표현력이 더 큰 테너 색소폰으로 바꿔 몰두했다. 그러나 문제는 뉴욕이란 곳이었다.

“뉴욕의 재즈 풍토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음악보다는 기교 같은 것을 뽐내는 데 열심이었죠.”그럼에도 뉴욕은 뉴욕이었다. 그가 살던 동네에 ‘55Bar’라는 작고 허름한 술집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죠수어 레드먼을 본 것이다. “내 가슴이 벅차 올랐죠. 큰 공연과 달리, 자기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으니 그런 데를 더 즐기는 거죠.”재즈가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라는 사실을 그는 뜻하지 않게 확인했다.

지난 2월, 그는 미국 생활을 접고 돌아 왔다. 타인, 특히 소수 민족에게는 무관심을 넘어 서 배타적인 동부가 부쩍 싫어진 때문이다. 무엇릿?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2000년 김덕수의 사물놀이 한울림과의 협연으로 재미를 갖게 된 국악과의 협연 등 못다 한 음악적 실험도 계속해 볼 생각이다. 유학 온 패션 디자이너와 9ㆍ11테러 1주일 뒤 결혼했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3-10-16 16:06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