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손길승 회장 거취 놓고 정치권 눈길 살피며 속앓이

"회장님이 알아서 하겠지만…"
전경련, 손길승 회장 거취 놓고 정치권 눈길 살피며 속앓이

“지금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입장이다.”(전국경제인연합회 K모 상무)

10월 중순을 넘기면서 전경련은 불가피하게 회장단 회의를 연거푸 연기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을 촉발한 SK비자금 수사 칼날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하기 때문.

특히 손길승 SK그룹 회장에 대한 검찰의 사법처리 방향과 다른 기업으로의 수사 확대 여부, 각종 여론의 추이 등을 면밀히 살피면서 최대한 막바지까지 회장단 회의를 연기하는 게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전경련 규정상 매월 둘째 주 목요일(10월9일)에 열리는 회장단 회의는 손 회장의 검찰 소환시기가 겹치면서 1주일 늦춰졌다. 그러나 정국이 다시 대통령 재신임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감기면서 23일로 1주일 더 연기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명분이 있었다.

각 그룹 회장들이 해외 출장 등으로 모임을 가질 여건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실제로는 손 회장을 둘러싼 검찰의 신병처리 수위와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시간을 버는 듯한 느낌이 역력했다. 대통령의 재신임 논란을 불러일으킨 단초를 제공한 손 회장이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숨을 고르는 형국이었고, 최종적으로는 손 회장에 대한 전경련의 마지막 배려였다.


SK 비자금에 연루, 사법처리 위기

SK는 지난 대선에서 ‘올 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 회장은 2000~2001년 SK 해운의 회계장부를 누락하는 수법으로 2,000억원 대의 부외자금을 조성했고 100여 억원을 정치권에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계좌추적 등 검찰의 수사 결과, SK는 2000년 총선과 대선전 100억원 대의 뭉칫돈을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게 전달했고, 대선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후보단일화를 이룬 민주당측 이상수 의원에게 10여 억원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모든 건 ‘보험’의 성격이 강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손 회장이 직접 부산으로 내려가 이모씨를 통해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11억원을 건넸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손길승 회장이 핵심역할을 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SK 비자금 수사가 정치권으로 표적을 옮기면서 손 회장의 사법처리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를 더 해봐야 한다”는 게 검찰측의 공식 입장이다.

검찰 역시 손 회장의 신병처리에 대해서는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일부에서는 ‘구속 불가피론’도 흘러 나오고 있으나 경제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통상적인 사건이라면 당연히 구속감이지만 전경련 회장이라는 위상과 경제에 미칠 영향을 감안할 때 검찰도 구속영장 청구에 부담감을 크게 느끼는 듯하다.

여기에 과거 정ㆍ재계의 역학관계 등에 비춰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정치자금을 제공해왔다는 현실론도 나오고 있다. 불구속 기소가 되더라도 형량 역시 통상수준과는 달리 낮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감도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손 회장의 전경련 회장 사퇴후 사법처리라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의 사퇴여부가 주목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 회장도 ‘전경련 회장 사퇴는 곧 사법처리’라는 등식을 의식한 듯 명예롭게 사퇴를 하는 것이 바로 문제해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눈치다.

전경련은 손 회장의 불구속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지만 그의 전경련 회장 자격 시비는 계속될 것으로 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입장이다. 전경련이 최근 불법정치자금 제공 거부와 투명경영 등 자정선언을 잇달아 발표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재계수장 위상 추락, 퇴진 불가피 전망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재계의 수장이 비자금이라는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것은 결국 재계의 위상 추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며 “막판까지 몰린 그의 결단만이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목소리도 없지 않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손 회장은 회장단으로부터 이미 재신임을 받은 만큼 전경련 체제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제기하면서도 “손 회장이 중도하차 한다 해도 그 시기는 손 회장만이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손 회장이 구속은 면하더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기소’될 경우 재계 수장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손 회장은 올 초부터 계속된 SK사태로 이미 대외활동에 제약을 받아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경제 관련 주요 현안 협상에서 정부측에 끌려갈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손 회장의 거취와는 상관없이 재계에는 벌써부터 차기 회장에 대한 하마평이 난무하고 있다.

이미 ‘0순위’로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올라 있지만 그 가능성은 다소 희박해 보인다. 최근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이 재계 2위인 LG그룹 구본무 회장을 회장 1순위로 점 찍어 간접적으로 구 회장에게 차기 전경련 회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 자리를 맡기를 원치 않고 있는 데다 재계 4위인 현대차 그룹 정몽구 회장 역시 중국과 미국 현지 법인 설립 등 그룹 업무가 많아 맡지 않겠다고 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 회장도 ‘현장 경영’에 몰두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경련의 차기 회장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구본무 LG 회장이나 정몽구 현대차 회장 같은 4대그룹 오너 회장이 차기 전경련 회장 자리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그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중견 그룹에 속하는 효성그룹의 조 회장은 재계에서 손꼽히는 국제통으로,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 등과 함께 재계 오너들 중에 해외에 지인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다.

DJ정부 시절부터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재계를 대표하는 단골 수행 인사로 활동한 조 회장은 얼마 전 미국에서 열린 한ㆍ미재계회의에서도 우리측 대표를 맡았다. 미국측 인사들도 조 회장을 ‘한국측 협상 파트너’로 비중 있게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정책수석실이나 경제 보좌관실에서도 삼성 등 주요그룹을 제외한 중견그룹 중에서는 효성 조석래 회장의 자문을 비중 있게 경청하는 편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SK비자금 수사가 더욱 속도를 내면서 재계는 손 회장이 과연 어떤 결정을, 언제 내릴 지 지켜보고 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 2003-10-23 11:12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