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에게 듣는다] 조동걸 국사학자·국민대명예교수



한국의 근대성은 난장판서 핀 역설의 꽃

집에서 600여m 떨어진 곳에 별도로 마련된 서재는 여전히 왕성한 현역 사학자라는 징표다. 10월 14일은 호남문화연구소에서 팩스가 와 있었다. 임진왜란과 한말 당시 창의의 본거지였던 전남 담양군 창평땅의 내력을 풀어 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사의 권위자로서 낯설지 않은 요청이다. 일주일에 한번은 나와 현황을 챙기는 독특한 사학단체의 업무 역시 동일한 범주다.

위원장 사무실에서 이것 저것 작업을 하던 선생, 바깥 바람이 그리울 법 하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옆이 서울 종로구 계동 일대의 북촌 한옥 마을이다. 청명한 가을, 여덟팔자 걸음으로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 보던 선생이 한 한식집에 성큼 들어 갔다.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 위원회의 7원칙을 만든 곳이죠.”

독립운동사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매진해 온 국사학자 조동걸(72ㆍ국민대 명예 교수, 한일역사공동위원회 한국측 위원장) 선생에게는 발길 닿는 데가 곧 자료실이고 연구실이다. 항일의 흔적을 찾아 강원도를 누볐던 이력은 1970년대의 방방곡곡 탐험으로 이어졌고, 이제 현해탄 너머로 펼쳐졌다.

2002년부터는 한일 역사 공동 연구 위원회의 초대 한국측 위원장으로 두 나라 간에 얽힌 착잡한 역사의 실타래를 사실(史實)의 힘으로 풀어 가고 있다.


"얼룩진 역사 바로잡는 일"

“일본이 고대 삼국 시대부터 우리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임진왜란은 아시아를 위해 출병한 결과라는 주장, 식민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등으로 얼룩진 역사를 바로 잡아 나가자는 거죠.”양국의 역사 연구를 ‘관리’하는 곳으로서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사업을 총괄하는 코디네이터가 바로 선생이다.

한국측에서는 김태식(홍익대) 등의 고대사 분과, 손승철(강원대) 등의 중근세사 분과, 정재정(서울시립대) 등의 근현세사 분과 등 세 분야로 나눠진 한일관계사 연구를 총괄하고 조정한다. 일본측 연구자는 하마다코샤쿠(濱田耕策ㆍ구주대), 요시다미츠오(吉田光男ㆍ동경대)등 12명.

교육부 산하에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대책반’이 빛을 본 것이 계기가 돼, 2001년 10월 한일 양국 정상의 합의로 설치된 곳이다. 양국 사학자들이 반년에 한번꼴로 번갈아 가며 대토론회를 주최, 실체적 진실을 밝혀 나가고 있다. 분과 회담까지 합치면 지금껏 30여회 열렸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일체의 언론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합의했죠.” 이들의 활동이 외부에 별로 알려지지 못 한 연유다. 학문적 연구를 외부에 발표하는 일이 말마따나 ‘플레이’가 될 수도 있는 테마가 바로 한일 관계사다. 상황에 따라서는 감정과 중첩돼 폭발력마저 지닌다. 그 정점에 선생이 있다.

“최근 극성을 부리는 일본의 국수주의 극우 논리가 현실적으로 문제되는 곳은 역사학계라기보다, 시바료타료(司馬遼太郞) 같은 인기 역사소설가 집단이죠.”

1997년 국민대 정년 퇴임 직후만 해도 이 같은 상황을 예측 못 했다. 산이 좋아 도봉산 부근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고 인근 아파트에 또 방을 얻어 각종 서책 자료를 모아 ‘우이서재’를 마련,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며 모처럼의 여유를 음미하고 있었다.

“산 기슭 기사 식당에서 선지국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을 때였죠.” 한국과 일본의 사학자 24명이 공동연구위원회의 대표로 추대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몇 번을 고사하던 선생은 2002년 5월,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호凸6韆舊?못 했다.

그 발단은 일본 교과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교육부 산하 기관으로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던 때였다. 2001년 10월, 고도의 식견이 필요한 문제니 만큼 전문 역사가에게 넘기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져, 선생이 수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선생은 매주 월요일이면 나와 한 주의 일을 가늠한다.


30여년간의 항일 역사연구

항일의 역사 연구는 1965년(33살) 춘천교대의 역사 교수로 본격 시작한 길은 4년 뒤, 독립 운동 편찬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운명이 됐다. 어찌 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하지만, 기득권층의 정사(正史)뒤에 가려져 한낱 갑남을녀로만 기억돼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에 현재의 볕을 쐬어 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일이다.

“서른세살부터 한 오년 동안은 강원도 속속들이 다녔죠. 33인 중심의 3ㆍ1운동이라는 공식을 깨고 싶었죠.” 북한강을 따라 무수하게 인터뷰를 했다. 독립운동의 사실적 점묘화가 완성된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지만, 어느새 민족 자결을 실천하고 있던 사람들의 실상이 그렇게 드러났다.

이어 1969년부터 10년 동안 원호처(현재 보훈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상근하면서부터는 한국독립운동사를 테마로 전국을 누비게 됐다. 부산형무소에서는 창고안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있던 판결문 더미를 발견, 대검찰청 직원 입회하에 16일 동안 사료를 연구했다.

당시 국내서는 부족한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문서 보관소까지 뒤졌던 선생의 정사(精査) 덕분에 드러난 사실은 세상을 경악시켰다.

특히 1920년 일본이 만주에서 독가스를 살포한 사실은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1974년께 사료를 비치해 놓은 영등포 흥국생명 빌딩에 불이 나, 중요 자료가 소실됐다. 당시 그 사건은 친일 단체의 고의 방화설이 제기되는 등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산골 노인의 증언 녹취 테이프 수십개 등 귀한 자료가 날아 갔죠.” 그 시절, 발견의 결과가 ‘독립운동사(10권)’와 ‘자료집(17권)’이다. 고서점에서는 150만원을 호가한다. 그리고 지금껏 이어 오고 있는 국민대와의 인연이다. 학문적 집대성의 기간이다. 서울대대학원 교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장,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등 굵직한 관련 직무를 병행하기도 한 세월이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내 테마는 사학사지요.” 역사학의 역사, 말하자면 ‘메타 역사’가 선생이 말하는 필생의 과제다.독립운동사가 구체적 테마라면 역사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즉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독립운동사가 품사론이라면, 사학사는 통사론인 셈이다. 1999년 한국사학회 학회장으로 추대, 현재 명예 회장이다. 1997년 8월 정년 퇴임 직후, 일간지나 학회지 등에 발표한 글을 모아 펴낸 책의 제목, ‘그래도 역사의 힘을 믿는다’에는 숙연함이 서려 있다.


현재의 토대 위에서 미래를 보다

선생은 과거에서 출발, 현재의 토대 위에서 미래를 본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평등한 민족주의, 즉 ‘대동민족주의’가 그 중추다. 이에 따르면 이웃의 역사까지 왜곡해 자신의 존립 근거를 굳히려는 일본은 만인이 평등한 민족주의라는 세계사적 대의를 정면에서 위배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즐겨 써 오고 있는 이 개념은 현실적으로는 남북 통일을 강력히 지향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본다면 선생은 그 너머에 가 있다. ‘다국적 국제인 체제’라는 독특한 해법이다. 그 출발점은 현재 지구적 화두로 떠오른 환경 문제와 비슷하다. “국민은 몰라도 어디엔가는 폐기해 놓았을 핵ㆍ산업ㆍ생활 쓰레기가 야기시키는 문제를 보세요.”

선생은 쓰레기를 양산할 뿐인 무한 경쟁 시스템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EU나 APEC이 지향하는 새로운 패권주의가 무한 경쟁 논리와 결부됐을 때, 지구상의 인간은 멸종하리라는 것. “WTO는 ‘자유’ 무역을 외치죠. 그러나 사람은 묶어 놓고 물자만 자유 왕래하자는 것이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WTO는 반인간주의라는 겁니다.”

선생은 거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빙하 시대 이전에 고생 인류가, 이후에 현생 인류가 살았는데, 쓰레기에 치여 죽을 현생인류를 먼 훗날의 인류는 ‘중생인류’로 부르게 될 거예요.”선생이 ‘중생 인류의 만가(挽歌)’라고 썼던 글의 요지다. 선생이 꿈꾸는 체제가 실현될 경우, 그 만가는 단지 악몽으로 끝날 것이란 전망이다. 과연 현실성 있는 말인가?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꿈ㆍ이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죠.”그 연후, 진정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 꿈은 현실을 추동하는 이상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 지점, 우리는 선생에 대한 고정 관념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진한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연구가로 치부한다.

실제로 일본의 우파 신문인 산케이 신문은 선생을 두고 ‘강경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그 모두를 뛰어 넘은 새 세계의 경지를 제시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민족주의가 완수될 때에야 진정 완수될 것”이라며 “한일 관계사 역시 인간 본위의 역사 서술로 풀어가고자 하는 것이 대동민족주의”라고 말했다. “‘유감’이든 ‘통석의 념’이든, 한일관계 역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재신임은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

선생의 연구와 사색은 동시대인들과 공유되고 있다. 가까이는 10월 9일 국민대에서 열렸던 ‘목요특강’의 200회 연사가 바로 선생이었다. ‘국호ㆍ국기ㆍ국가ㆍ국화는 언제,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제하로 2시간 가까이 펼쳐졌던 특강이었다. 또 24일은 팩스로 부탁 받았던 호남문화연구소의 강연이 열린다. 일은 계속 이어진다.

상경해서는 11월중으로 출판될 ‘한국 근현대사의 탐구’(경인문화사刊)의 마지막 과정도 지켜봐야 한다. 1993년부터 써 온 워드 프로세서로 탈고한, 통권 22번째 책이다. 위원회의 일이 빠질 수 없다. 매일 새벽 다섯시면 선생은 일어나 그날치의 일감을 가늠한다.

“한국의 근대성은 식민 통치와 군사 독재라는 난장판에서 피어난 역설(逆設)의 꽃이죠.”독립 운동은 거기서 한국 특유의 인권 사상이나 민주화 여정의 거름이 됐다는 것. 바로, 선생이 한국사의 힘에서 걷어 올린 고갱이다.

선생은 정치인들의 관심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민간 단체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국 정상 협의로 만들었는데, 교육부가 연구비 등의 명목으로 지원하는 예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재신임 정국에 대해 선생은 대단히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다.

“신임 여부를 떠나, 이번 일은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죠. 1,000억 이상의 효과라고나 할까요.”한마디로, 아주 기분 좋았다는 것.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3-10-23 13:49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