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비자금 대선자금 유입 밝혀지며 도덕성·청렴성에 큰 상천

불꺼진 昌, 이대로 지나
SK 비자금 대선자금 유입 밝혀지며 도덕성·청렴성에 큰 상천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파문이 불거지자 많은 사람들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노 대통령이 불신임되면 그 후임에는 이 전 총재가 가장 근접해 있을 것이란 예상에서다.

실제 각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도 차기(보궐선거가 실시될 경우) 대통령을 묻는 질문에 단연 이 전 총재가 1위를 차지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한나라당내에서도 이 전 총재의 조기 귀국 및 정계 복귀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제16대 대선이 끝난 지 10개월만에 지펴지기 시작한 이른바 ‘창(昌) 부활론’이다.

하지만 이런 ‘창 부활론’은 제대로 고개를 들기도 전에 다시 사그라지고 있다. ‘SK발 100억원 한나라당 유입’ 건이 이 전 총재의 발목을 꽉 붙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토록 이 전 총재를 괴롭혔던 아들 병역비리 의혹과 한인옥씨의 기업체 자금 수수 의혹 등은 모두 근거 없는 공작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관행으로 여겨져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던 대선자금 문제가 이 전 총재를 ‘정치적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호기있게 돌아왔는데...

10월20일 인천공항에 내린 이 전 총재는 예전 귀국길 때와는 달리 노 정권의 정국 운영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재신임 관련 언론 보도를 보면서 솔직히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을 했다"며 “나라가 정말 혼란스럽고 국민이 모두 불안에 떨고 있는데 대통령이 어렵다고 해서 재신임이라는 정치도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민투표 방식은 헌법 위반이며 지금은 정치도박을 할 시기가 아니다. 대통령은 어려움을 푸는 데 고민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현실정치에 대해 그간 “나는 정계은퇴한 사람”이라며 언급을 자제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 전 총재는 또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의 SK대선자금 수수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그는 “여러 억측들이 나오던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동안 무수한 모략중상을 받아 이제 진저리가 나는 기분”이라고 강도 높게 반박한 뒤 “당이나 당원들이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다 혹시 불법을 저질렀다면 그건 모두 후보의 책임”이라고 자신있게 못박았다.

물론 정계 복귀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선 후 정계를 떠나면서 국민께 말씀드렸다. 그 심경에 변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런 이 전 총재의 행보에 대해 정가에서는 두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현실 정치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은 곧 정계복귀의 신호탄을 의미하는 것이고, SK 100억원 유입 건에 정색한 부분은 이 전 총재의 평소 스타일을 감안할 경우 그의 주장대로 악의적인 ‘이벤트’에 불과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여기까지는 이 전 총재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는 듯 했다.


침울하게 치러진 아들 혼사

그러나 오랜만에 보여준 이 전 총재의 호기있는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SK자금이 당으로 불법 유입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본인이 밝혔던 ‘후보 책임론’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칫 검찰의 이 전 총재의 직접 수사도 배제할 수 없으며 일각에서는 출국금지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 전총재로서는 대선패배 때보다도 더 위기상황이다. 불법자금이 기업에서 이 전 총재를 위해서 흘러들어 왔다는 것은 평소 ‘법대로’를 외쳐온 이 전 총재에게는 도덕성 측면에서 심각한 치명타가 된다. 정치재개 여부가 이 문제로 인해 완전히 물 건너 갔다는 분위기다.

10월25일 성북동 성당에서는 열린 차남 수연(36)씨의 결혼식에 나온 이 전 총재의 얼굴도 결코 밝지 않았다. 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지만 보도진의 쏟아진 질문 공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불과 5일전 공항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였다.

이 전 총재의 측근에 따르면 검찰 수사가 마무리된 이후 적절한 시×?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계속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측근은 “일각에서 조기 사과론이 제기됐지만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시점에서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두 차례 대선후보를 지낸 정치지도자이자 정치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을 정치권과 국민에게 할 것으로 본다” 고 덧붙였다. 조기 사과 철회 방침은 SK외에 다른 기업체의 불법 모금 행위가 혹시나 수면위로 부상할 것을 대비해서다.

이제는 이 전 총재의 입장표명 수위나 성격만 남아 있다. 측근의 말대로 정치지도자로서 하고픈 말을 정치권과 국민에게 한다는 대목은 현재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사면론과 맞물려 이 전 총재가 전 국민을 향한 사죄의 형태로 이뤄질 것임을 점치게 한다.

물론 대선자금 부분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여야를 막론하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다. 노 대통령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에 따라 이 전 총재가 ‘판도라의 상자’인 대선자금과 관련, 구 정치의 마지막 사슬로 규정한 뒤 국민 전체를 향해 여야 모두에 대한 정치적 사면의 이해를 구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즉 대선 자금 문제를 검찰이 여야 구분 없이 파헤칠 경우 노 대통령마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는 만큼 이쯤에서 여야 지도부가 함께 국민을 향해 과거 정치의 불법 부분에 사죄하는 모양새를 취하자는 것이다. 고해성사후 대사면에 이은 제도개혁 수순으로 가자는 얘기다.

만일 이 전 총재가 반격에 나선다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한나라당의 말대로 ‘왜 대선 패자만 공격하느냐’, ‘왜 한나라당만 집중 수사하느냐’고 공세에 나선다면 정국이 한바탕 대선자금 회오리에 휩싸여지게 된다.

그러나 본인이 정계 은퇴한 마당에 야당 탄압을 제기하고 나선다면 이 전 총재 특유의 ‘명분 정치’마저 사라진다. 그래서 대국민 사죄의 변 이야기가 현 시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전총재는 10월31일 부친의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뒤 11월초 출국하려고 했으나 검찰 수사를 지켜보며 일정을 재조정해야 할 입장이다. 이회창 전 총재의 재기 불씨는 이대로 사그러지고 말 것인지 정가는 지켜보고 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 2003-10-29 15:09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