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인에 불리한 연대보증제도 "폐지 시급"

新보증대란… 빚 보증에 망가진 인생 속출
보증인에 불리한 연대보증제도 "폐지 시급"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초기. 거리로 내몰린 것은 은행 빚에 시달리다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과 명예 퇴직자 뿐이 아니었다. 가족, 친구, 혹은 직장 동료의 빚 보증을 잘못 섰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이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식 연대보증제의 폐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되돌아 보게 한 때였다. 오죽했으면 “빚 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마라”는 속담이 있을까만 말이다.

‘97년의 교훈’을 벌써 잊어버린 것일까. 한도 제한 등 연대보증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잇단 조치에 한동안 잠잠한 듯했던 보증 폐해가 극심한 경기 불황과 함께 다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상태로 1~2년 지속된다면 보증 파산이 IMF 당시를 능가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환 대출이 보증 위기 불러

최근 보증 위기의 진원지는 신용카드 업계의 대환 대출이다. 대환 대출이란 카드사에서 밀린 연체금을 장기 대출로 전환해줘 카드 연체자가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는 것을 막아주는 제도. 카드 대출의 연체율이 급증하기 시작한 최근 1~2년 새 카드사들이 조금이라도 대출을 더 많이 회수해 보겠다며 도입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8월말 현재 국내 9개 카드사의 대환 대출 총액은 15조6,526억원. 5개월 전인 3월말(10조6,346억원)에 비해 5조원 이상이 증가한 수치다. 매월 대환대출액이 1조원 가량씩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카드사 대환 대출에는 대부분 연대보증인이 필요하다는 것.

카드업계 한 관계자는 “대환 대출의 70~80% 가량은 보증인이 있는 ‘보증부 대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카드사 중 대환 대출 규모가 가장 큰 LG카드(6조4,000억원)의 경우 사실상 100% 보증인을 요구하고 있다.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적어도 10조원 이상의 대환 대출에 연대 보증인들이 “대신 빚을 갚아줄 수 있다”고 서명을 해줬다는 얘기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환 대출이 일반 은행 대출과 달리 이미 연체를 경험한 악성 대출이라는 점. “대환 대출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상태로는 전액 회수할 수 없는 대출이다.

이 중 실제 회수 가능한 금액은 적게는 10~20%, 많아야 50%를 넘기기 힘들 것이다.” 업계 한 임원의 진단이 말해주듯 결국은 보증인이 채무를 떠안아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장 5년인 대환 대출의 금리가 연 19~20%로 초고금리인 탓에 자칫 잘못하면 대출 원금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1~2년 뒤 곪아 터질 수도

이미 적신호는 곳곳에서 켜지고 있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는 대환 대출에 대한 보증 피해를 호소하는 글들이 연일 줄을 잇고 있다. 대환 대출로 전환하는 친구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그 친구가 파산을 신청하는 바람에 카드사에서 차압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연에서부터, 대환 대출 이자를 도저히 갚지 못해 개인 워크아웃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보증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겠느냐는 사연까지.

서울YMCA 신용사회운동 사무국 서영경 팀장은 “은행권과 달리 카드사들은 보증인의 자격이나 보증 한도액에 대해 세심한 심사를 하지 않는다”며 “1~2년 뒤에는 대환 대출 부실이 곪아 터지면서 보증 피해가 크게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금융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다. 금융감독원 비은행감독국 이상민 선임은 “문제점을 알고는 있지만 카드사별 자율 리스크 관리를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감독 당국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기는 힘들다”고만 밝혔다.

은행권의 연대보증 문제도 다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카드사의 대환 대출에 비해 아직 미미하기는 하지만 급증하는 가계 대출과 함께 보증 피해도 다시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은행이 개인 대출에 보증을 요구하는 경우는 개인의 신용 한도를 초과하는 범위의 대출을 받을 때. 하지만 최근 대출 기간 동안 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만기 대출을 연장 받기 힘든 이들이 크게 늘면서 연대보증을 요구하는 사례도 급증하는 추세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계 부실이 사회 문제화하면서 은행들이 개인의 신용 한도를 점차 줄여나가는 추세”라며 “따라?대출을 연장할 때 보증인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근엔 연대보증의 문제점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도입된 신용보증기관의 보증서에까지 보증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늘어나 제도 도입의 취지까지 무색케 하고 있다.

게다가 보증 제도 자체가 보증인에게 지나치게 불리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1,000만원의 신용 한도를 가진 사람이 2,000만원을 대출 받을 때 보증인에게 초과하는 1,000만원이 아니라 2,000만원 전체에 대해서 연대 책임을 묻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 한복환 사무국장은 “아직까지는 보증 채무 때문에 파산을 신청하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가계 부실이 확산될 경우 앞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보증은 서민들만 선다?

또 다른 문제는 금융기관들은 대출자들에게 보증을 요구하고 있지만, 개인들의 보증 기피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 정부 기관은 물론 삼성, LG 등 대부분 대기업은 외환 위기 이후 직원들에게 아예 보증용 재직증명서 발급을 중단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직원들이 주변 사람들의 보증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기 때문에 아예 회사 차원에서 차단해 달라고 요구해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특히 대출자에게는 보증인을 강요하는 은행, 카드사 등 금융기관들 조차도 정작 자신들은 보증용 재직증명서 발급을 금지하고 있어 ‘얌체 상혼’이라는 비판도 들끓는다. “재정적으로 불안할 경우 대형 금융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금융기관들의 해명이지만 어쩔 수 없이 보증을 서야 하는 이들에게는 곱게 비쳐질 리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결국 연대보증을 서 줄 수 있는 사람은 서민 뿐”이라는 자조도 흘러나온다. 대기업 직원들이나 금융기관 종사자, 공무원 등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보증을 회피하기 때문에 중소업체 직원들이나 영세 자영업자들만이 보증을 서게 되는 탓이다.

이는 ‘신용불량 가족’을 양산하는 결과로도 이어진다. 마땅한 보증인을 찾지 못한 대출자들이 결국 부모, 배우자, 형제 등을 보증인으로 세우면서 온 가족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

신용사회구현 시민연대 석승억 대표는 “가족 전체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경우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며 “금융기관의 편의에 따라 제3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연대보증제도가 하루 빨리 폐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30 16:01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