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 열풍 주도한 노래 잘하는 이야기꾼

[추억의 LP 여행] 이문세(上)
발라드 열풍 주도한 노래 잘하는 이야기꾼

만능 엔터테이너 이문세. 1980~90년대를 걸쳐 발라드 열풍을 주도했던 그의 출발점은 가수보다는 방송의 이야기꾼이었다. 86년 출세작인 '난 아직 모르잖아요' 이전까지 '나는 행복한 사람'등 히트곡도 제법 많은 가수였지만 이문세는 DJ나 MC의 명성이 가수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별밤지기”, “일밤지기”로 불리며 '노래 잘하는 방송DJ'로 더욱 유명했다. 노래만을 전념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타고 난 재능이 많았던 까닭이었다. 20년이 넘도록 그는 포크, 발라드, 퓨전 등 다양한 음악적 실험과 더불어 수많은 히트곡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꾸미지 않는 자연스런 이미지와 노래 덕에 그는 지금도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라이브 가수로 사랑 받고 있다. 여전히 끝없는 음악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이문세는 엄격한 부친 이충노씨와 노래 잘하고 자상한 모친 안순씨의 2남 3녀 중 막내로 1957년 1월 17일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났다. 독자로 알려진 그에겐 사실 백일을 채 못 넘기고 세상을 등진 형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외아들이 되었다. 막내를 예쁘게 화장시키는 걸 재미있어 했던 누나들 사이에서 성장한 그는 여성적인 남자 아이로 자랐다.

어린 시절 유난히 "어머나"라는 감탄사를 많이 사용해 놀림도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왕십리에서 정릉의 3백평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집 앞 공터는 밤마다 아베크 족이 끊이질 않을 만큼 후미진 곳이었다. 4살박이 꼬마 이문세는 이들 아베크 족들에게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꾸냥의 귀걸이' 등을 앙증맞게 불러 박수를 받았던 동네 인기 가수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큰누나와 누나 친구들의 손을 잡고 고고장엘 갔다. 누나의 신청으로 무대에 올라간 어린 이문세는 사람들의 폭소와 환호에 신이나 정신 없이 춤을 추었다. 그는 누나가 강제로 끌어내릴 때까지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도 라이브 무대에서 전력을 다하는 것은 이처럼 타고난 끼가 있었기 때문. 이런 기질 덕분에 정릉 청덕초등학교 시절 학교 대항 배구 대회 때 전교 응원단장으로 뽑히게 됐다. 남성 듀오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경신중학교 때는 합창단의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사춘기로 접어든 당시, 풍금을 치며 노래하는 음악 선생님에게 반해 처음으로 짝사랑의 감정을 품었다. 자신의 타고난 음악성을 인정해 주는 선생님의 권유로 막연하게 성악가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당시 그가 좋아했던 음악은 팝송이었다.

아이스하키로 유명하던 광성고에 입학해서도 특유의 재담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스키, 테니스, 수영, 탁구, 배드민턴,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만큼 만능 스포츠맨이다.

하지만 고교시절의 그는 성악가가 되려고, 대중 음악보다는 클래식에 심취해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공대를 나와 건실한 직업인이 되야 한다"고 말해 온 보수적인 아버지는 성악가가 되려는 아들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아들의 열정에 손을 든 부친은 뒤늦게 고 3 때 음대 교수에게 개인 레슨을 받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음악 공부를 시작했던 까닭에 성악으로 대학 진학을 하려는 마음을 접었다.

이에 연세대 공대를 지원했지만, 고배를 마시고 후기인 명지대 전자 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는 다시 대중 음악으로 돌아왔다.

1977년 노래가 하고 싶어 무작정 명륜동 '돌샘' 카페를 찾아가 송창식 등 기성가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무교동의 라이브 카페 '꽃잎'에 진출했다. 당시 그의 노래 아르바이트비는 1만5,000원. 고 김정호가 주인이었던 카페 '꽃잎'은 이문세에겐 잊지 못할 장소다.

이곳에서 평생의 음악 구세주인 KBS 개그맨 전유성을 소개 받은 것.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해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1979년 전유성은 '참신하고 말 잘하고 통기타 치고 노래까지 하는 대학생 얘기 손님'으로 이문세를 기독교방송 '세븐틴'의 송관율 PD에게 소개했다. 입담 좋고 노래도 잘 부르는 이문세의 재능에 송PD는 홀딱 반해버렸다. 처음에는 이야기 손님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이후 고정 출연자로 기용된 이문세는 몇 개월 후 대 선배 양희은의 뒤를 이어 '세븐?의 DJ로 기용되는 기적을 일궈냈다. 가수 지망생 이문세가 노래가 아닌 옆길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81년 KBS TV '달려라 중계차'의 리포터, KBS 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DJ(81-83년), KBS2FM'젊은이의 노래'(83년)를 거쳤다. 이 기간 중 그는 81년 데뷔 음반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가수보다 DJ 겸 MC로 더 알려졌다.

그래서 83년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KBS2TV '젊음의 행진'의 더블 MC 왕영은, 송승환에 대항하기 위해 MBC TV가 신설한 '영11'의 진행자로 스카우트되었다. KBS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면서도 MBC로 둥지를 옮긴 이유는 성인 프로로 진출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즘은 '나는 행복한 사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여고생부터 여대생까지 유독 여성팬이 많았다. 부드럽고 타고난 미성도 어필했지만, 178㎝의 훤칠한 키와 단정한 용모도 한몫 했다. 선배 DJ 이종환은 얼굴이 긴 그만 보면 늘 '얼굴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놀렸다. 그래서 그는 '조랑말'과 '반달'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0-31 10:23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