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옥중 수양록 24만에 공개


사형선고를 눈앞에 둔 미결수. 그것도 18년간 일국을 통치해온 절대 권력자 대통령을 시해한 중죄인의 신분. 차디찬 감방에 누워 예고된 그 날만을 묵묵히 기다려야 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어서일까,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는 누구나 담담해지기 마련인가. 그가 남긴 글에는 불안감이나 공포 등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평온한 마음 자세마저 엿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이 실제 마음 상태를 그대로 전한 것인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기 위한 의도성에서 작성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뒤 옥중에서 작성한 수양록 원본이 10ㆍ26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에 공개됐다. 한국일보가 단독 입수해 공개한 김 전 부장의 옥중수양록에는 2심 재판 당시인 1980년 1월21일부터 3월17일까지의 심정이 대학노트 1권(32쪽)에 일기식으로 적혀 있다.

수양록에서 김재규는 10ㆍ26사건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규정했으며, 유신헌법이 선포된 이후 네차례에 걸쳐 박 대통령 시해 계획을 세웠으나 정리(情理)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섯번째에 결행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또 공범인 부하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 등에 대해서는 ‘죄가 없으니 반드시 살리고 싶다’ 는 간절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며, 박 대통령을 ‘각하’라고 꼬박꼬박 칭하는 예를 갖추면서도 시해에 대한 사죄나 참회 등의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사형을 예감한 듯 각 장마다 점을 찍는 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지해 나간 흔적도 남아 있으며, 글씨체는 끝까지 흔들림 없이 비교적 고른 상태를 유지했다. 심경의 급격한 변화없이 평상심을 끝까지 유지했다는 반증이다.

또 불심(佛心)에 의해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적어놓은 불경 구절이 곳곳에 눈에 띄고,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ㆍ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이란 대승불교 금강경의 한 구절을 적은 흰 봉투도 함께 들어 있다. 김재규는 구속된 동안에도 ‘장군’ 이란 호칭으로 불리기를 바랬으며 비교적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양록의 첫 장은 1980년 1월21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0ㆍ26사건이 근 3개월이 지난 시점. 막강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서 ‘대역무도한’ 중죄인이 된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이젠 (군)검찰 측의 혹독한 수사나 심문도 끝나고 법정의 판결만을 기다리는 상태다. 펜을 들어 심경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사건 발발 3개월 만에 생겼다는 뜻이다. 다음은 수양록의 요약 내용.

[1월21일] 2심이 내일로 다가왔다. 1심 기록이 남아야 한다. 역사의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사가 되기 때문. 군사재판은 기대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 단념한다. 불도에 귀의해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육신을 어떻게 다루던 알 바 아니다. 마음의 본성은 공(空)만 확고히 잊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강신옥 변호사가 보안사 요원들이 항소포기시키려 공작하고 있다는 것 전달하고…. 밑에 친구들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살리고 싶다. 법도 정상 참작이 있을 법한데 급히 서두르는 꼴이 기대할 것 못 되는 것 같아. 관세음보살님 저 젊은 사람들 살려주소서. 합장.

[1월22일] 꿈에 상(想)자에서 심(心)자를 떼라는 계시를 받았다. 무심하라는 계시. 매사에 무심하면 마음이 평안하고 동요되지 않는다. 이제 천지가 뒤집어져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1월23일] 재판이 생각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이다. 박흥주 대령 살릴 길 없겠는가. 한없이 마음이 아프다. 박선호군의 선량한 얼굴, 저 경비원들 저 무심한 표정들 살리고 싶다. 이제야 죄의식이 든다. 지금까지는 정당성 주장으로 죄책감 못 느꼈다. 그러나 이제 저 얼굴들 보니 죽고싶다. 하루빨리.

[1월24일] 이제 언도공판이 남았다. 재판장 윤흥정 장군, 성의껏 해주었다. 법무사 검찰관, 예의도 지켰다. 유한이 없다.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

[1월25일] 군법회의도 끝나고 최종 최후의 준비를 해야겠다. 불심에 귀의해서 평화로운 최후가 되도록 계속 노력한다. 마음의 안정은 찾았다. 금일부터 더욱 불법에 정진한다. 성불만이 최고의 희망이다. 조용한 하루를 지냈다. 마음은 평온하다. 모든 잡념 사라지고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1월26일] 정승화 대장에 대해 검찰관 심문에서 극구 관계없음을 이야기했으나 별로 받아들이는 기색이 없다. 우리나라의 한심한 점이다. 국가나 군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없는가. 무슨 이유인지 감정이 몹시 앞서 있다. 틀림없이 한번 문제가 일어나리라.


계획된 '혁명' 강조

일주일간 김재규의 심경은 불도 귀의와 함께 정승화 대장을 포함한 부하들에 대한 구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거의 매일같이 ‘불심에 의해 평안한 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로 평안한 심리상태였다기 보다 본인이 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자기 최면의 일환인 것으로 보여진다. 정말로 평안했다면 굳이 글로 쓰면서까지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시해행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부하들을 보고 나니 처음으로 죽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문구에서 이 같은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부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박 대통령 시해는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당성 강조를 위해 그는 다음날인 1월27일의 기록에서 세차례에 걸친 박 대통령 시해 계획을 소개했다. 우발적 범행이 아닌 계획된 혁명이었음을 강변한 것. 27일의 기록은 수양록 전체 분량의 절반에 해당할 정도로 가장 길었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도, 남기고 싶은 말도 많았다.

[1월27일] 자유. 1972년 10월 유신과 더불어 자유민주주의는 아무 까닭없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영구 집권을 위해서 말살되고 말았다. 어렵게 지켜온 자유를 집권욕 충족을 위해 말살한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중대사건이다.

혁명. 10월유신 직후 제3군단장으로 복무하면서 헌법을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옆에 있으면 주먹질을 할 정도로 한없이 미워졌다. 이 때 생각했다. 이 목숨바쳐서라도 자유를 회복해야겠다고…

대통령의 전방군단 연말 시찰 때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으로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를 완료했지만 차마 정리(情理)때문에 결행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 자신을 졸장부로 생각, 비웃었다.

중앙정보부 차장 근무시 긴급조치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됐다. 이런 놈의 정치가 어디에 있나. 국민을 우매하게 봐도 분수가 있지. 민심이 천심인데 국민이 우매하다면 하늘이 우매하다는 건데 하늘이 우매한가. 하늘을 우매하다고 보는 사람이 우매하지. 그후 건설부 장관으로 전보됐는데 밉고 미운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여하히 해야 하는가 곰곰히 생각했다. 사방에 아무도 용기를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하는 방법이외에는.

1974년 9월14일 건설부 장관 사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자결하는 방법을 결심한 뒤 당일 권총을 품고 입장했다. 그러나 막상 결행하려고 하니 인정(人情)이 가로막았다. 못남을 뉘우쳤다. 그러다 1975년 2월 연두순시때 건설부에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다. 그날도 완전한 준비를 해 놓았지만 용기부족과 인정이 나를 막았다. 단념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유서와 태극기를 모두 불태웠다.

1976년 12월 돌연 중정부장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대통령을 설득해서 유신체제를 고쳐보자고 했는데 조금도 틈이 없고 어림도 없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 기울여 하지 않아 혁명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79년 4월 결행하려다 10월26일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


혁명으로 미화 시키려는 의도 엿보여

유신헌법을 제정 반포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하다. 유신이후 군단장 시절과 건설부장관 및 중정부장 때 총 4회에 걸쳐 박 대통령 시해를 준비했지만 실행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자책을 거듭 적고 있다. 박 대통령 시해 계획을 수차례 가졌다고는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정리(情理)때문에 못한 일을 어째서 ‘그날’에는 정리가 가로막지 않았는지, 3~4번이나 계획을 세웠다는데 뭘 어떻게 준비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실제 계획이 있었는지도 불투명하다. 준비와 후회를 몇차례 반복하다 5회 때 감행했다는 점도 선뜻 믿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본인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보다 거국적으로 부여하고 싶어서, 또 그래야 죽음을 앞둔 자신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을 거라는 심리적 차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몰아간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이 글이 후세에까지 남겨질 것도 생각해서 스스로 시해를 혁명으로 미화시키려 한 것은 아닐까. 같은 날 적힌 다음 글에서는 이런 심리가 반영된 것인지 몰라도 10ㆍ26이후의 국가적 미래 과제를 단계별로 나눠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혁명의 목적] (1)자유민주주의 회복 (2)국민희생을 없애고 불행을 예방 (3)적화예방 (4)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호혜이익 도모 (5)독재국가 이미지 씻고 국민 명예회복. 이를 위해 박 대통령 각하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의 성공] 10ㆍ26 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됐다. 혁명결행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혁명 과업수행이다.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오전건 장동운 길재호 등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9호를 기초한 자를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권력과 결탁해 특혜를 받은 대기업 등 설거지거리 수업이 많이 있다. 1개 군인 소장의 정치 경험으로 국사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최 대통령은 이런 소인배에 국가의 중대사를 맡겨도 좋은가.

[우리나라의 전망] 2,3월 개학기가 위기가 될 것이다. 언론 보도 통제는 현명한 방법이 못 된다. 일시에 대폭발이 돼 그동안의 불만이 터진다. 노동자가 대정부 투쟁을 할 것이고 종교계 중심으로 자유화 투쟁이 거세게 일 것이다. 국회가 개원되면 정국은 흔들릴 것이고 물가고를 못잡으면 대 정부 불신임이 고조될 것이다. 북한은 평화공세로 나오면서 국론분열을 부채질 할 것이다. 속지말고 착실히 대처해야 한다.

[혁명후 복안] 3~5개월내 정국을 안정시킨다. 행정기능은 일사불란한 대민봉사를 하고 여당우위의 사고방식을 제거한다. 선거과열방지와 행정부 절대 중립을 보장한다. 정권과 지도자 교체는 정당한 민의로서만 이뤄지게 하고 인위적 방식으로 장기집권은 절대 못하게 한다.

[국회의 처사] 국회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민의를 대변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회복되는 날 지금의 국회의원들은 무엇을 했다고 하겠는지.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책임은 비단 행정부만이 아니고 입법부에도 있다.

[국민들에게]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자유가 병들었던 것은 우리의 노력 부족과 무관심에서 빚어졌습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곧 지옥입니다. 국민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킵시다. “오늘은 나를 위하고 내일은 후손들을 위하여”


전두환 정권 등장 예고

김재규는 스스로 10ㆍ26사건에 대한 의미를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혁명으로 정의했다. 그는 여기서 향후 국정에 대한 전망 등을 내놓았는데 상당 부분은 그대로 나타났다. 상당한 예지력이 있었다. 먼저 전두환 정권의 개막을 예고했으며 이를 경계했다.

또 대학가와 노동계, 종교계 등의 거센 투쟁도 내다봤으며, 북의 노림수도 간파했다. 수양록 대부분 중 ‘국민들에게’ 부분만큼은 존칭을 썼다. 이 글이 공개될 것도 감안했다는 뜻이다.

[1월28일] 대통령 일가의 횡포.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관여치 말라는 노여움만 삼) 최의민의 전화도청으로 최가 일일이 배후조종하는 사실.

[2월 8일] 세월은 유수와 같이 잘 가는구나. 마음닦는 수련에 들자. 사람이 몸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 진짜 사람, 즉 나라는 것 이제 알았다. 재산을 국방헌금으로 하라는 요청받고 동의했다. 내 재산은 10억원 정도일 것이다.

[2월28일] 사형선고없이 견성할 수 있었겠는가. 육신 즉 유한생명을 바치고 무한생명 부처를 찾았다. 불행이 지혜의 눈으로 보면 곧 행복이 된다는 진리를 입증해 주었다.

[3월16일] 변호사가 대통령과 대법원장께 서신 준비해보라는 의견. 대법원장께는 준비했지만 대통령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3월17일] 선정(禪定)이 부족하다. 전념선정 선정삼매 유실실개는 양심에 가책없다. 돌아가신 분의 명예를 생각하면 가슴아프다. 그러나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잖은가.


부하들에 대한 애절한 심정 담겨

1월27일 장문(長文)에 걸친 고해성사를 끝낸 탓인지 이날 이후부터는 매일 기록하지도 않았고 내용도 특이한 점이 없다. 또 두서없이 손 가는대로 적어놓은 글들도 있다. 그저 불심에 대한 열정과 충성스런 부하에 대한 애절한 마음으로 수양록을 마치고 있다.

김재규의 최후
   


분노, 체념… 린?교차
염주 쥔 채 역사 속으로

주군인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정도로 강한 정신의 소유자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도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는 나약한 보통 인간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재규는 1980년 5월24일 새벽4시40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당시 계엄사 합수부는 김재규를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007 영화' 를 방불케 하는 극비작전을 폈다. 이송 중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탈주 또는 범인탈취를 막기위해 냉동차 모양의 똑같은 호송차 3대를 동원, 김을 첫번째 호송차에 태우고 나머지 2대는 빈차로 운행했다. 이들 주위는 완전 무장한 헌병 1개중대가 호위했다.

서울구치소에서는 김에게 '장군'이란 호칭까지 사용하면서 사형집행을 알리지 않은 채 단순한 이감조치라며 안심시켰다. 본인도 확정판결이 5월20일 이뤄졌기에 4일만에 형이 집행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은 듯 했다. 하지만 3시간도 지나지 않은 오전7시30분 형 집행이 이뤄졌다.

김재규는 통고를 받고 방을 나오는 순간 창백한 얼굴로 변하며 상기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막상 형장을 10여m 앞두고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힘들었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교도관들에게 들려 가다시피 형장 안으로 들어갔다.

계엄사 군인 및 검찰관계자와 구치소 직원, 종교인 등 4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 집행이 시작됐다. 김은 약간은 분노한 듯한 표정 속에 한편으로는 체념한 듯한 다소 이중적인 모습으로 허공을 바라보았으며 눈가는 젖어있었다.

본적과 주소 및 경력 등을 확인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 분명한 지를 확인하는 검사의 인정신문에 김은 모두 담담하게 사실대로 답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김에게 "종교의식을 하겠느냐"고 제의했으나 거부했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는 질문에도 "할 말 없다" 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두 손을 합장한 채 10ㆍ26사건 이후 어머니로부터 받은 염주를 손에 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 2003-11-05 11:03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