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불법 정치자금 수사 5대그룹외 두산·풍산 확대로 초긴장불법 정치자금 요구 불응 천명, 전경련도 구심점 못찾고 표류

발등에 떨어진 대선자금 불똥
재계, 불법 정치자금 수사 5대그룹외 두산·풍산 확대로 초긴장
불법 정치자금 요구 불응 천명, 전경련도 구심점 못찾고 표류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가 삼성, LG, 현대자동차, 롯데 등 5대 그룹을 넘어 두산과 풍산 등으로까지 확대키로 내부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재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1월 2일 “정치자금의 전모를 밝히되 기업의 일반자금이나 보험성 정치자금은 사면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치자금의 전모가 완전히 드러날 경우 과연 의도대로 수습 될 수 있을 지 현재로선 불분명하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재계가 긴장하는 이유는 ‘사면 범위’의 불투명성에 있다. 결코 액면 그대로의 사면이 아님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검찰이 정치권의 정치자금을 먼저 조사한 뒤 5대 그룹의 실무자를 대상으로 확인하고 비자금 전반이 아니라 정치자금만 조사하는 등 한정적인 수사를 벌인다 해도 정치자금 자체가 워낙 비밀스럽고 은밀한 부분이 많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 부분을 파헤칠 경우, 기업들로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나아가 외국인 투자자, 소액주주, 채권자 등 기업의 이해 당자사가 기업의 정치자금을 과연 사면해 줄 수 있을 지, 또 사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과연 형성될 수 있을 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특히 정치자금 전모가 공개될 경우, SK와 같이 분식회계 여부 등 자금조성에 있어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 항간에 파다한 터에 재계로서는 발등의 불이 아닐 수 없다.


"제도적장치 마련한 뒤 돈 달래라"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재계가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여 묘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이 10월30일 비공개 간담회를 열고 “정치자금 제도개선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자금 요구에 불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재계가 지난 대선이전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지 1년 여 만의 재천명인 셈이다. 재계는 “정치 자금을 정당하게 낼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된다면 기업들은 안심하고 돈을 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돈은 돈대로 내고 기업인들이 피해를 입는 불상사는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며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정치 자금 수사가 다른 기업으로 확산돼 기업 총수들이 검찰에 불려 갈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는 지금 재계가 정치권을 심각하게 불신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정치 자금이란 수요처인 정치권이 먼저 요구해서 냈을 뿐인데 이로 인해 국민의 지탄 대상이 되고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되는 상황으로 몰린 데 대한 재계의 불만과 피해 의식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기업측은 정당한 정치 자금만 내겠다는 말은 여러 번 반복됐다. 하지만 결코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었다. 기업이 정치권의 요구에 못 이겨 정치 자금을 건넨 경우도 많지만 특혜를 노리거나 ‘잘 봐 달라’며 보험성 불법 자금을 제공하는 등 정치 자금에 관한 한, 재계도 반성할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자정 선언 역시 공염불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이 엄존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손길승 SK회장은 지난해 1월 관훈토론회에 참석, “법에 따른 정당한 정치 자금만 내겠다”고 공언했으나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지난달 전경련 회장의 자리에서 중도하차 하는 등 재계 스스로 신뢰성에 먹칠을 했다.

재계 일각에선 “정치 자금 수요 때문에 기업인들이 망가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지만 최근 드러난 일련의 비자금 사건과 SK분식회계 사건 등에 대해 재계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재계의 입장에서는 현 위기를 타개할 강력한 모멘텀이 필요한 상황이다. 재계 전체의 침체된 분위기를 새롭게 다잡고, 정부와 공조관계를 유지하며, 기업간의 긴밀한 협조를 모색하고 국가 산업경쟁력을 높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재계의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 재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의 실체이다.


전경련 위상 실추, 후임 맛?선임 진통

전경련은 고민에 빠졌다. 자진 사퇴한 손 회장 후임으로 적임자를 물색 중에 있지만 쉽게 그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경련은 최근 진통 끝에 회장단 중 최연장자인 강신호(77) 동아제약 회장을 회장대행으로 선출했지만, 강 회장이 강력히 고사함에 따라 후임자 선정이 현재 다시 원점으로 돌아 간 상태다. 현재로선 정치 자금 사태가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데다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도 여전히 높아, 실세 회장이 정부와의 갈등이라는 부담을 무릅쓰고 나와 독주를 마시듯 전경련 회장을 맡을 가능성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표류하는 전경련의 ‘제자리 찾기’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재계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재계가 정치자금 수사의 타깃으로 떠오르면서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는 실세회장 선출에 실패하고 가까스로 추대한 대행회장 마저 회장직을 고사하는 등 전경련의 모양새 마저 일그러지고 있는 분위기다. 일각에서 ‘전경련 해체론’마저 제기되고 있는 것도 그만큼 전경련의 위상이 실추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전경련내 기업간의 공조관계는 이제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이미 LG와 현대차, 롯데가 전경련에 대한 반발을 공공연하게 표출하고 있는 데다 특정 그룹이 전경련을 독식한다며 ‘삼경련’이라고 부를 만큼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또 주요그룹 총수들 마저 전경련에 대해 큰 무게를 두지 않으면서, 오래전부터 재계의 대표 단체라는 전경련의 입지는 크게 흔들려 왔다.

게다가 회장 선임 문제가 계속 표류할 경우, 전경련은 한국경제를 이끄는 총수들의 모임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당분간 실체적인 실천 역량의 뒷받침 없이 성명서나 건의문만을 흔드는 ‘종이 호랑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짙다. 물론 과거에도 회장을 뽑는 데는 항상 우여곡절을 겪었다. 따라서 실세 회장이 후임자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그만큼 시간과 갈등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로선 전경련 회장 및 원로자문단이 강 회장에 대한 추대 의사가 강하기 때문에 강 회장이 내년 2월까지는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수행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는 쪽이 우세하다. 그러나 강 회장의 회장직 수행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세 회장 체제가 복원되지 않는 한 전경련의 위상 회복이 요원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치 자금의 수사가 재계로 확대될 경우, 어쩌면 정치적 타협을 위해서라도 실세 회장이 재계의 대표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일련의 정치 게임적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재계 전체가 안고 있는 큰 부담을 한 그룹의 오너 회장이 대신 지고 나설 것이라고 내다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내년 2월까지 전경련은 주인 없는 공백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표류하는 전경련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MK 행보에 재계 주목
   

'MK가 뛰고 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11월1일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데 이어 '동북아판 다보스 포럼' 발족을 제안,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회장은 제주도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회 제주평화포럼에서 세계적 권위의 기업인, 경제학자, 경제계 지도자와 정부 인사들이 참석하는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인 '동북아시아 경제 와이즈맨 원탁회의(NEAR)' 개최를 주창했다.

세계의 권위 있는 경제계 지도자들이 정례적으로 만나 동북아 경제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 및 발전적 대안을 모색, 교류 활성화와 신뢰 구축의 장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다.

정 회장은 이번 제주평화포럼에 재계 총수로서는 유일하게 참석, 행사기간 노 대통령과 특별 면담을 갖기도 했다. 정 회장의 행보는 현대차가 동북아 경제 허브 구상이라는 정부의 목표에 대등한 파트너로 손을 잡는 동시에 기업 본연의 역할인 경제불안 해소 및 경제 살리기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

하지만 5대 기업의 정치 자금 수사와 전경련 후임 회장 선임 진통 등으로 재계가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현대차 그룹이 새로운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데 대해 재계는 특별히 주목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대차의 이번 제안은 '글로벌 톱5 진입'을 목표로 하는 현대차 위상에 맞게 '동북아 경제 공동 번영'이라는 거시적 테마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내 비친 것일 뿐, 특별한 다른 배경은 없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 2003-11-05 11:46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