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영 KCC 명예회장 "현정은 회장체제 존중" 발표로 수습국면가신 청산요구 등 대주주로서 그룹 섭정의지, 갈등 불씨 여전

현대 경영권 갈등의 엔딩은?
정상영 KCC 명예회장 "현정은 회장체제 존중" 발표로 수습국면
가신 청산요구 등 대주주로서 그룹 섭정의지, 갈등 불씨 여전


왕자의 난, ‘왕 회장’ 사망, 현대건설 및 하이닉스반도체 유동성 위기, 적통 싸움, 그리고 정몽헌 회장의 자살까지.

최근 몇 년간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현대가(家)가 이번엔 며느리와 정씨 일가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얘기는 바로 현대가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링에 오른 두 사람은 고 정몽헌 회장의 아내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과 정상영 KCC 명예 회장. 정 명예회장은 몇 번의 가공할만한 ‘카운터 펀치’를 날려 현 회장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은 다음 곧바로 “현정은 체제를 존중하겠다”며 스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병 주고 약 준 격. 하지만 이는 미봉에 불과할 뿐, 분쟁의 불씨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정씨 일가의 경영권 굳히기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주가가 폭등한다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봐야 하는 것이 주식시장의 생리다.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가 그랬다. 10월 중순 2만8,000원대에 불과했던 주가는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연일 큰 폭 상승하며 8만원에 육박했다. 시장에는 소문이 무성했다. “8월에 이어 또 다시 인수ㆍ합병(M&A) 위기가 재연되는 것이 아니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었다. 11월4일 신한BNP파리바투신운용은 사모 펀드를 통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71만9,330주, 12.8%를 사들였다고 신고했다. 시장의 관측이 역시 사실로 확인된 순간.

특히 이 펀드의 수익자가 국내 투자자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내에서 적대적 M&A가 시도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대두됐다. 매입 주체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의혹의 시선은 당연히 KCC의 정 명예회장에게 쏠렸다.

그가 정몽헌 회장의 사망 후 그룹의 어른 역할을 자처하며 분주히 움직여온 탓이었다. KCC측 역시 “회사 이름으로는 사모펀드에 출자한 것이 없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 개인적인 투자는 회사가 알 수 없다”고 진한 여운을 남겼다. 공식, 비공식 라인을 통해 매입 주체가 정 명예회장임이 확인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KCC 고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정 명예회장의 위치는 현 회장의 친척이었지만, 이번 지분 매입으로 대주주의 위치가 됐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일 주식시장 장 마감이 임박한 무렵. M&A 재료가 소멸됐다는 인식에 따라 이틀째 급락세를 보이던 현대엘리베이터 주가가 다시 요동을 쳤다. 하한가에 머물던 주가가 장 마감을 15분 가량 앞두고 대량 매수세가 순식간에 유입되면서 곧바로 3.95% 상승하는 대반전이 이뤄진 것.

정 명예회장이 최대주주인 KCC측이 증권사 창구를 통해 2차 공세에 나선 때문이었다. 이날 추가로 사들인 물량은 42만주(7.5%). 이로써 정 명예회장측은 우호 지분을 포함해 40%에 육박하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확보, 27% 정도에 불과한 현 회장측을 완전히 압도하게 됐다. 정 명예회장을 앞세운 정씨 일가가 현대그룹 경영권 굳히기에 나선 셈이었다.


문중과 며느리의 갈등

양측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10월 초순에 열린 정씨 일가 회의였다. 이날 회의에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제외한 고 정몽헌 회장의 형제들과 삼촌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KCC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은 현대 가문의 본류다. 현대그룹만은 정씨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 정몽헌 회장의 장모인 김문희 여사(용문학원 이사장)와 현정은 회장 라인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정씨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집안의 며느리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수는 없다는 의견에 대부분의 정씨 집안 사람들이 동조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하지만 현 회장측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정씨 일가는 “그룹 경영을 하려면 경영 능력과 함께 전문 식견이 있어야 한다”며 “앞으로 그룹 정상화를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한데 결국 정씨 일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 아니냐”며 설득했지만 저항은 완강했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 정씨 일가는 현 회장측에 경영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현대엘리베이터를 그룹에서 떼내어 주는 것과 더불어 ‘플러스 알파’를 줄 수도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문희 여사는 이 자리에서 혼자가 된 딸을 도와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정은씨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전격 취임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21일. 집안 측과의 갈등을 서둘러 봉합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무렵, 이미 정 명예회장은 사모 펀드를 동원해 주식을 사들이면서 반격을 도모하고 있었다.


안정적 지분 확보한 정씨 일가

싸움은 자금력을 무기로 무차별 공세를 편 정 명예회장측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됐다. 지분 구조로 볼 때 현 회장측이 맞설 수 있는 여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측이 확보한 지분 중 확실한 것은 사모 펀드를 통한 12.8%와 KCC가 보유한 8.6% 등 21.4% 가량. 이것 만으로도 이미 김문희 여사가 보유한 18.6%를 능가한다.

관건은 범 현대 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이 어느 쪽에 우호 지분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인지 여부. 하지만 이 역시 승산은 정 명예회장측이 더 높다. 현대증권(4.88%) 현대엘리베이터 자사주(1.75%) 현대중공업(2.14%) 등이 현 회장측 우호 지분으로 작용한다 해도 확보 가능한 지분은 총 27.3%에 불과한 실정.

만약 정 회장 사후 M&A 방어 목적으로 지난 8월 범 현대 계열사가 사들인 15.1%의 지분이 모두 정씨 일가의 우호 지분이 될 경우 정 명예회장은 36.5%의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KCC의 한 관계자는 “이번 주식 매집이 정 명예회장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가족 회의를 거쳐 결정된 사항”이라며 “따라서 범 현대 계열사의 지분에 대해서는 정 명예회장의 영향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지분 싸움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는 확신이었다.

물론 현 회장측이 경영권을 방어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자금을 끌어 들여 유통 물량을 사들이거나, 8.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를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방법도 점쳐볼 수 있다. 또 현재 정 명예회장측이 우호 지분으로 확신하고 있는 범 현대 계열사를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지분 경쟁을 벌일 만큼 자금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데다 맞대결 양상으로 치달을 경우 모양새가 좋지 않을 수 있어 쉽게 맞대응을 하기는 버겨운 처지다.


양측 회동에서 결론 날까

정 명예회장이 중국 외유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9일. 그는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KCC의 입장’이라는 발표 자료를 통해 “본인과 KCC 등 범 현대가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취득한 것은 현대그룹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현정은 회장의 현 체제를 존중할 것이며 현 회장이 향후에도 그룹 정상화와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지분 매집이 경영권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식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현 체제에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은 조카며느리의 경영권을 탈취했다는 세간의 도덕적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한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게가다 여러 가지 정황상 경영권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경영권을 압박하려는 의도 정도는 깔려있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현대그룹의 안정적 경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만큼 현대그룹에 대해 대주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발표문 내용은 이번 지분 매집의 의도를 다분히 암시하는 대목이다.

KCC 한 관계자는 “현 회장측이 1대 주주라는 이유로 정씨 일가가 이뤄낸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라며 “정 명예회장 역시 지분으로 힘을 과시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현 회장을 그대로 인정하되 대주주로서 사실상 그룹을 ‘섭정’하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는 것이다.

결국 정 명예회장은 지분 매집을 통해 현대그룹을 정씨 일가의 되瘦?안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했고, 또 현 회장에게 명목상의 지위를 인정해 줌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셈이다.

하지만 이대로 분쟁이 해소될 것으로 보는 것은 시기상조다. 대주주로서의 영향력을 확보한 정 명예회장은 우선 이른바 가신그룹이 현대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이라는 판단 아래 이들의 청산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정 명예회장은 현 회장에게 그룹 경영전략팀 김재수 사장과 현대택배 강명구 회장 등 가신그룹의 청산을 요구했지만 현 회장이 이를 강력히 거부해 갈등이 더욱 증폭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섭정 체제가 본격화하면 어떤 형태로든 양측의 갈등은 다시 표면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 경우, 어느 한쪽은 반드시 백기를 들어야 하는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캐스팅보트는 MK MJ 손에?
   

양측의 힘 겨루기가 재연된다면 가장 큰 변수는 정몽구(MK) 현대차 회장과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MJ) 의원의 행보다. 현대가 내에서 여전히 가장 막강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경영권 향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도는 관측은 MK와 MJ가 정 명예회장의 뜻에 이미 동의하지 않았겠느냐는 것. 어차피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정씨 문중의 일원으로서 '김문희-현정은' 라인에 줄을 설 리는 없을 것이라는 이유다. 특히 MK의 경우 고 정몽헌 회장과 줄곧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 온 마당에 이제 와서 현 회장의 손을 들어줄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며 중립적 위치를 지켜온 현대차그룹과 현대중공업측은 삼촌과 제수(형수)를 축으로 한 일가 내부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에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KCC측이 정 명예회장의 입장을 설명하는 기자 간담회에서 "MK를 포함한 범 현대가가 지분 매집에 동의했다"고 밝히자 현대차그룹이 "집안 분쟁에 우리를 끼어넣지 말라"며 발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자동차그룹의 일에만 매진한다는 입장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일축했다.

설사 현 회장을 지원하고 싶다 해도 현대차그룹 자체가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지분 추가 매입 등 경영권 위기에 봉착해 있어 실제 도움을 줄 여유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게다가 MK가 현 회장 지원에 나설 경우 자칫 스스로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넘보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 되는 요인이다.

MJ가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이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1%를 보유하고 있는 상태. MJ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한쪽의 우호 지분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는 "현 회장이 이번 사태를 가족 내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의지가 확고한 만큼 MK와 MJ를 만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하지만 이들이 협조를 해줄 지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1-12 16:36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