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명퇴시대의 직장인들, 주경야독하며 자기개발에 투자

생존을 위한 선택 '샐러던트'
30대 명퇴시대의 직장인들, 주경야독하며 자기개발에 투자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 뭉치. 사사건건 부딪히는 상사와의 신경전…. 잔뜩 스트레스를 받으며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칠 즈음 누군가 제안한다. “한 잔 어때?”

이심전심이다. 삼삼오오 모여 든 동료들은 삼겹살에 소주 잔을 기울인다. 상사 험담에서 시작된 얘기는 비어가는 소주 병과 함께 정치, 경제, 그리고 신세 한탄까지 자연스레 번진다. 연일 계속되는 술 자리이지만 ‘안주’가 바닥나는 법은 없다.

“2차 가자. 이번엔 내가 쏠께.” 기분 좋게 달아 오를 무렵, 일행 중 한 명이 다시 호기 넘치게 외친다. 이렇게 또 1주일 내내 술이다. 아내가 이날 만큼은 꼭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다음 날 해야 할 일도 산더미 같은데. 그렇게 하루가, 또 한 달이, 그리고 1년이 간다.

직장인들은 그랬다. 사회에 발을 담그면서부터 개인을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퇴근 후 얼마 안 되는 시간은 자의 반, 타의 반 동료들과의 술 자리에 헌납해야 했고, 휴일은 평소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가끔은 시간을 쪼개 영어 공부를 시작하거나 자격증 시험에 도전해 보기도 하지만 본인의 의지 부족이거나 혹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 탓에 작심삼일이었다. 우리 시대 직장인들은 그렇게 하루하루 쳇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사회는 이제 냉혹해졌다. 근무 시간은 물론 근무 외 시간에도 나태한 이들은 설 곳이 없다. 직장은 어느 정도의 영어 구사 능력은 기본이라고, 또 자격증 1~2개쯤은 필수라고 요구한다. 공부는 학창 시절 때나 하는 것이라며 여전히 술 자리만 기웃거린다면 대단히 용감한(?) 직장인이다.

출발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 자신의 ‘몸 값’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냥 멍하니 손을 놓고 있다가는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직장인들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저마다의 공부에 매달린다. 직장인(샐러리맨)인 동시에 학생(스튜던트)인 이른바 ‘샐러ㆍ던트’는 30대에 이미 명예퇴직을 강요받는, 소위 ‘38선 시대’를 사는 샐러리맨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10여개의 자격증도 부족하다

입사 3년 차. 삼성생명 의정부지점 원영웅(28) 주임은 학생 때나 지금이나 하루 일과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꽉 짜여진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듣는 대신 보험 설계사들을 교육하는 업무를 본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업무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공부에 투자된다.

오전 6시30분 집을 나서 회사에 도착한 뒤 업무가 시작되기 전 1시간 가량은 영어 회화 공부. 그리고 업무가 끝나면 세무사와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을 따기 위한 준비에 3~4시간을 투자한다. 휴일이면 아예 학생이나 다름 없다. 모교인 고려대 도서관을 찾아 책과 씨름을 하다 보면 해가 저무는 것이 보통이다.

투자상담사 1, 2종, 외환관리사, 금융자산관리사, 고객 자산관리사(CFP), 한자검정시험 3급, 변액판매관리사…. 10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자격증도 아직 부족하다고 했다.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기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저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부단히 자기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산관리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 당장은 본사 파이낸셜플래너(FP) 센터로 발령을 받아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자산 관리 업무를 해 보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언젠가는 국내에서는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자산 관리에 관한 책도 한 권 써 보고 싶다고 했다.


CFA, 다음은 MBA

“학생 때는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더니 요즘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조흥은행 외환업무부 김주헌(33) 대리는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 듣는다. 연세대에서 경영학과, 경영대학원을 이수했지만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그였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던 거죠. 과연 머리를 싸 매고 매달릴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98년 은행에 입사한 이후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평생 그저 그런 평범한 직장인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공적자금을 받은 은행에서 어느 순간 명예퇴직 대상에 오를 지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가 공인재무분석사(CFA) 시험에 도전하게 된 것은 입사 2년 뒤인 2001년. 은행 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도전 자격을 얻었다. “1년간 1차례씩 총 3차 시험에서 한번이라도 낙오할 경우 수천만원에 달하는 학원비를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은행측이 제시한 기준이 몹시 엄격했지만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평일에는 밤잠을 설쳐 가며, 주말이면 학생 때는 좀처럼 찾지 않던 도서관을 찾아가며 공부하기를 3년. 8월 중순 3차 시험까지 모두 통과하며 결국 CFA 자격증을 따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CFA 자격증을 획득하기가 무섭게 그가 다시 목표로 세운 것은 MBA 과정. “투자 업무에 전문성을 갖기 위해서”다.

물론 이번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은행에서 MBA 지원자로 선발되는 인원이라고 해봐야 1년에 고작 1~2명에 불과한 데다, 신한은행과의 합병으로 이마저도 확실치 않은 탓이다.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겠죠. 숱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밖에요.”


샐러던트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샐러ㆍ던트’가 단지 20대, 30대 젊은 직장인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인천국제공항 세관에서 근무하는 김영은 정보외환계장은 올해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된다’(知天命)는 50세. 이제라도 깨달아야 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요즘 만학 의지를 불태운다.

사이버 대학인 서울디지털대학교 법무행정학부 경찰학과 3학년. 그맘때 동료들이라면 퇴근 후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그는 밤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새벽 1시, 어쩔 때는 새벽 2시. 비록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것이지만 주 단위로 반드시 강의를 이수해야 하기 때문에 빠듯하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경찰학 하나로는 부족해 법학까지 복수 전공을 하고 있는 터였다. 지난 학기까지 평균 성적은 4.5점 만점에 4.37점. 학교측으로부터 성적 우수 장학금까지 받았다. 3학년 2학기까지 졸업 이수 학점(140점)을 모두 이수할 계획이어서 조기 졸업까지 가능한 상황이다.

6급 주사인 김씨의 정년은 57세. 정년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 뒤늦게 공부는 왜 하는 것일까. 그는 “현재 맡고 있는 밀수 관련 업무를 더 체계적으로 배워서 퇴직하기 전에 후배들에게 새로운 수사 기법을 전수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무관 승진을 통해 정년도 60세로 늘려보고 싶어요. 나이가 적건 많건 자신의 앞에는 늘 도전해야 할 산이 놓여있는 것 같아요.” 입시 전쟁에 시달려야 하는 초ㆍ중ㆍ고등학생, 취업 전쟁에 피가 마르는 대학생, 그리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직장인…. 단 한 순간도 경쟁하고, 또 도전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삼성의 혹독한 사원 교육
삼성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샐러ㆍ던트'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은 직장인 개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장의 보이지 않는 강요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들은 우수한 사원들을 선발해 연수나 유학을 보내주는 '당근'을 제시하거나, 혹은 일정한 교육 코스를 이수하지 못하거나 성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주는 '채찍'을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어학 학원 등에 다니는 사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원해주지 않는 기업들은 요즘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 중에서도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은 사원들을 혹독하게 교육시키기로 정평이 나있다. 삼성의 교육은 입사 시점부터 시작된다. '25박26일'의 합숙 교육. 자유분방한 학생의 신분에서 전문적인 직장인, 혹은 조직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다른 기업의 사원들과는 차별적인 '삼성맨'이 될 수 있도록 경영 철학, 기업 문화 등도 집중 교육 대상이 된다.

사원에서 대리, 대리에서 과장, 그리고 차장, 부장 등 직급이 한 단계씩 상승할 때에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육이 있다. 이른바 '가치 공유 교육'. 1~2주에 걸쳐 진행되는 이 교육은 직급에 맞는 가치관을 사실상 주입시키는 과정이다.

계열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승진의 기본 조건은 어학 실력. 영어의 경우 최소 3등급(토익 630점)이 기본으로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일부 나이가 많은 사원들에게는 승진에 최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어학 실력이 떨어지는 사원들은 반(反) 강제적으로 삼성 인력개발원에 마련된 '외국어 생활관'에 들어간다. 24시간 합숙을 하는 이 프로그램은 10주 가량의 코스. 합숙 기간 동안 외국인들과 직접 부딪히며 집중 교육을 받는다. 삼성측은 "세계에서 가장 성과가 높은 어학 훈련"이라고 자부한다.

최근엔 인터넷 학습을 하는 그룹 차원의 'e-러닝' 과정을 개설하면서 예전에 비해 합숙 교육이 그나마 많이 줄어든 상태. 하지만 인터넷 학습 역시 계열사 별로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과정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이밖에도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해 매년 200~250명 가량을 50개국에 1년간 파견하는 '지역 전문가 과정'이 운영되고 있고, 50명 가량을 미 경영학 석사(MBA) 학위 취득을 위해 2년간 연수시켜주는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다. 인력개발원 신태균 상무는 "끊임없이 배우고 개발하지 않으면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대처할 수 없다"며 "이런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 제1의 인재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1-25 16:29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