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경영권 분쟁 鄭·玄 '안면 몰수' 난타전



그룹 공식인수 선언에 '국민기업화 선언' 비장의 카드로 응수
KCC측 법원에 가처분 신청, 국민주 발행 성공여부에 승패 달려

11월17일 오후 2시 서울 동숭동 현대엘리베이터 서울사무소 빌딩으로 고급 세단 승용차들이 몰려 들었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 등 현대그룹 5개 계열사 사장들이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의 긴급 호출을 받은 것이었다.

잠시 뒤, 현 회장은 언론에 보도자료를 내고 ‘엘리베이터 국민 기업화’를 선언했다. 전격적이었다. 불과 3일 전 엘리베이터 주식을 꾸준히 사모아 최대주주로 등극한 뒤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선언한 KCC 정상영 명예회장 측에게 보기 좋게 ‘한 방’을 날린 것이었다.

정 명예회장 측의 일방적 승리가 예상됐던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의 전세가 현 회장 쪽으로 다시 기우는 순간이었다.


국민기업으로 돌파

‘엘리베이터 국민기업화’는 우호 지분을 포함해 40% 이상의 지분을 끌어 모은 정 명예회장 측을 견제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다. 자금이 없어 지분 경쟁을 할 수 없는 만큼 국민의 돈으로 기존 지분을 희석함으로써 정 명예회장 측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실리를 챙김과 동시와 국민적 명분을 함께 얻겠다는 의도였다.

현 회장측이 구상하는 국민주 발행의 그림은 대강 이렇다. ‘우선 12월 중순 1,000만주의 유상 증자(178%)를 실시해 현재 561만주인 엘리베이터 주식 수를 1,561만주로 늘린다. 신주는 우리사주조합에 ‘20% 이내’에서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는 기관 65%, 일반 투자자 35%를 배정한다.

특히 일반 투자자의 경우 1인당 주식 수를 제한(300주)해 정 명예회장 측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식을 매입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다. 이와 함께 12월말 434만여주 규모의 무상증자도 동시에 단행, 기존 주주와 신규 국민주 취득자에게 1주당 0.28주의 비율로 배분한다.’

국민주 발행을 통한 유ㆍ무상 증자가 차질 없이 추진된다면 엘리베이터 자본금 규모는 현재 281억원에 1,000억원 수준(2,000만주)으로 무려 4배 가량 늘어나게 된다. 이 경우 정 명예회장 측의 지분율은 10%를 간신히 넘어서는 수준. 범 현대가를 포함하는 우호 지분 역시 현재 44%대에서 15%대로 떨어진다.

대주주로서의 전권을 행사하기 힘든 수치다. 물론 현 회장측 지분 역시 10% 안팎으로 추락하지만, 우리사주조합이 인수할 수 있는 5%대의 신주 물량을 합치면 지분 경쟁에서 정 명예회장 측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국민주 일등 공신은 가신 그룹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국민기업화’ 방안은 그룹 내 이른바 ‘가신 그룹’들의 작품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 막 일선에 뛰어든 현 회장이 스스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관측 때문이다. 특히 정 명예회장이 가신 그룹들에 대해 오래 전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져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그는 사석에서 “정씨 일가가 공들여 세운 현대그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가신 그룹들 때문”이라고 누누이 말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KCC가 현대그룹을 장악하게 될 경우 1순위 퇴출 대상에 가신 그룹의 이름들이 줄줄이 오르내렸다. 결국 경영전략팀 김재수 사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등 가신 그룹들이 KCC의 공세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국민기업화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라는 얘기다.

“남편(정몽헌 회장)이 예전부터 국민기업화를 생각해 왔었다”는 현 회장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국민을 볼모로 삼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절박한 상황에서 급조된 아이디어라는 흔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국민기업화 방안 발표 불과 이틀 뒤 무상 증자 및 발행가 하향 조정 등 새로운 카드를 꺼내든 것이 대표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가 곳곳에서 제기되자 부랴부랴 청약률을 높이기 위한 유인책을 꺼내 든 셈이다.

특히 현 회장 측은 당초 우리사주조합에 신주의 20%를 배정할 계획이었지만, ‘조합원의 경우 지분 매입 한도액이 연봉액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을 뒤늦게 확인하?‘20% 이내’로 문구를 수정했다. 증자 후 지분 경쟁에서 22%대 15%로 정 명예회장 측을 압도적으로 누를 수 있다는 것이 당초 계산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증자가 성공하더라도 양측의 지분율이 15%대로 비슷해져 박빙의 승부를 벌여야 하는 셈이 돼 버린 것이다.


신경전, 폭로전…막말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 차례씩의 가공할 만한 펀치를 주고 받은 양측의 싸움은 이후 난타전의 양상으로 번진 분위기다.

현 회장 측의 국민기업화 발표 이후 KCC측은 당장 반격에 나섰다. 법원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며 사태를 법정으로까지 끌고 간 것. KCC측은 소장에서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 결정은 사실상 지배구조 획득 차원으로 신기술 도입과 재무구조 개선에 국한돼 있는 증권거래법과 정관상의 증자 요건을 벗어난다”고 주장했다.

KCC측은 이와 함께 “현 이사진이 과다한 유상 증자로 주주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이사진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도 제출했다.

이후 양측의 대립은 서로 막말까지 주고 받는 등 극도의 신경전과 폭로전으로 비화했다.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나서지 않던 정 명예회장은 20일 급기야 보도자료를 내고 “본인이 상중에 몰래 엘리베이터 주식을 대량 매입했다느니 유족의 상속 포기를 종용했다느니 하는 김문희(현 회장의 어머니)씨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는 “주식 매입은 적대적 M&A를 우려한 그룹 최고 경영진의 다급한 요청으로 시작됐으며, 상속 포기를 권유한 것도 고 정몽헌 회장의 보증 채무가 1조원에 달했기 때문인데 진의를 왜곡하고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문희 여사측의 응수도 거칠었다. 김 여사는 한 통신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처음에는 설혹 M&A 방어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경영권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대량 매집을 한 것을 보면 누구나 경영권을 뺏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며 “자기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 ‘엘리베이터 (경영도) 못할 것이다’고 정 명예회장이 말한 것도 기억이 난다”고 폭로했다.


숱한 변수에 최종 승패는 안개 속

현 회장 측이 극적으로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은 했지만 최종 승자를 예측하기엔 아직 이르다. 우선 국민주 발행의 성공 여부가 이번 싸움의 승패를 가를 최대 관건이다. 공모가 하향 조정, 무상 증자 등 투자 유인책을 여럿 내놓았지만 자칫 일반 투자자들의 참여가 저조해 실권주가 대량으로 발생할 경우 증자의 효과가 크게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한 애널리스트는 “최근 주가를 감안할 때 신주 발행가도 부담스러운 수준이어서 투자자들이 얼마나 동참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KCC측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결정에도 양측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만약 법원이 KCC측의 손을 들어줄 경우 현 회장 측의 증자 추진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본안 소송의 경우 적어도 6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여 내년 3월로 예정된 주주총회에서 현재 지분이 많은 정 명예회장 측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 중대 변수로 등장한 것은 KCC가 사모 펀드 등을 통해 인수한 지분의 적법성 여부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KCC가 뮤추얼펀드를 통해 확보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7.81%에 대해 의결권이 제한된다는 유권 해석을 내놓았기 때문. 이미 5% 이상 지분을 확보한 주주가 1% 이상 지분이 변동할 때 거래일 이내에 보고토록 한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금감원은 또 신한BNP투신운용 사모펀드를 통해 확보한 지분(12.82%) 역시 규정에 위배되지만, 지분의 소유권이 투신사에 있는 만큼 실제 주총에서 의결권이 행사됐을 경우 정당성 여부를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뮤추얼 펀드에 대한 의결권 제한 조치로 정 명예회장 측 의결권 가능 지분은 범 현대가 지분을 모두 합치더라도 36%대로 추락한 상황. 특히 사모 펀드까지 의결권 이 제한될 경우 지분이 23%대로 떨어져 설사 가처분 신청에서 승소한다고 해도 지분 경쟁에서 현 회장 측(26%대)에게 밀리게 된다.

변수 하나 하나에 역전, 재역전을 거듭할 만한 극적인 요소들이 담겨있는 셈.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종순 KCC 부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경영권 행사를 밝히고 있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1-25 16:47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