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할 관념 형성에 따른 영향

[두레우물 육아교실] "일곱살 딸애 '남녀구분' 괜찮은지"
성역할 관념 형성에 따른 영향

Q.“안녕하세요? 저는 일곱 살 된 딸아이를 둔 주부입니다. 제 딸 은경이가 최근 들어 부쩍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말을 많이 늘어놓습니다. ‘분홍색은 여자 색이고 파란색은 남자 색이야’하는 정도는 약과입니다. 어느 날은 제가 신문을 보고 있었더니, ‘엄마, 신문은 아빠가 보는 거야, 엄마는 설거지하는 사람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남자들은 힘이 세고 용감하니까 힘이 약하고 겁이 많은 여자들을 돌봐줘야 해, 난 여자라서 간호사가 돼야 해. 의사는 남자애들이 하는 거야 등등의 말들을 생각 없이 내뱉습니다.

‘그렇지 않아. 여자 애들도 씩씩하기 때문에 남자애들 도움 없이 자기 일을 혼자서 할 수 있어’하고 말해줘도 엄마 말이 틀렸다고 합니다.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유치원에서 아빠는 책상다리, 엄마는 호호 웃음 하는 식으로 남녀의 성 역할을 과도하게 구분해서 가르치는 듯 합니다. 이런 것이 아이의 성 역할 관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부닷컴 두레우물 육아 상담 게시판, 일산에서 은경 엄마가)



엄마 아빠의 역할 인식

한 십 년 만에 대학 동창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주부들 모이면 다 그렇듯 이야기의 주메뉴는 아이와 남편에 대한 거였다. 친구 이야기 중 이런 내용도 있었다. 큰 아이가 태어난 지 몇 개월 지나 부산 시댁에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운전면허가 없어서 당연히 운전은 친구의 몫. 아이는 뒷자리, 아기용 카시트에 앉혀놓고 남편은 조수석에 앉아 부산으로 직행. 그러던 중 고속도로에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친구는 속으로 남편이 뒤에 가서 아이 좀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 없더란다. 남편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얼굴로 앉아있고…. “왜 그때 남편한테 ‘뒤로 가서 애 좀 봐!’라고 못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이 화가 나. 남편도 밉고.”

또 다른 심각한 이야기. 며칠 전 40대 가장이 공기총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이 끔찍한 사건은 가장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처자식에게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마련해 줘야 할 가장으로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했으니 가장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결국 가장의 괴로움은 네 사람의 죽음으로 결론을 맺었다.

주부닷컴 두레우물 육아 상담 게시판에 올라온 은경 엄마의 고민을 읽다 친구의 사연과 40대 가장의 가족 살해 사건이 떠올랐다. 친구의 어정쩡한 태도나 친구 남편의 무관심 그리고 40대 가장의 무서운 결론이 모두 어려서 부터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아이를 돌보는 건 엄마의 몫이고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건-살리든 죽이든-반드시 가장이 해야 할 일이라는 관념이 그들 모두에게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비롯된 건 아닌지.

사실 이런 강박관념은 아직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산달을 앞둔 산모와 아빠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 아기용품점엘 간다. 분홍색으로 해야 하나 파란색으로 해야 하나? 분홍색 물건을 샀는데 만약 아들이면 어쩌지? 반대로 파란색을 골랐는데 딸이면? 분홍색이면 어떻고 파란색이면 어떠랴만 남녀를 구분 지어주는 색깔에 대한 고정관념은 물건 하나 고르는데도 갈등을 일으킨다.

허나 색깔의 구분은 아이가 자라면서 따라야 할 수많은 고정되고 왜곡된 성역할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위 사연의 은경이처럼 유치원에 다닐 정도가 되면 아이들 머리 속에는 분홍색은 여자색, 파란색은 남자색으로 단단히 자리잡고 만약 남자애가 분홍색에 끌리거나 여자애가 파란색에 끌리면 그 아이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스스로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정관념의 옳고 그름 가르쳐야

바로 이런 죄책감 그리고 고정관념으로 인해 발생되는 보다 심각한 상황이 문제다. 성역할의 또렷한 구분으로 남자, 여자 모두 편안했던 시절이 있駭쩝層?모르겠다.

그러나 요즘엔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지나친 성역할의 구분으로 얼마나 많은 콤플렉스-온달 콤플렉스, 장남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 등-가 만들어지는지, 또 그런 콤플렉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남성과 여성이 고통받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고통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가정과 사회에 확대되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주부 우울증의 큰 원인으로 고정된 성 역할의 강요를 지적하기도 하고, 올 봄 충남의 초등학교 교장 자살 사건은 ‘여교사의 차 시중’이 발단이 되었다.)

“사회가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과연 미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쉽게 예단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다양한 놀이와 역할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고정된 성 역할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선택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김희진 교수는 우리 아이들은 강요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찾아낸, 선택한 역할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내 아이가 남자, 여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 그대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무엇이건 도전해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사회 구석구석, 우리의 정신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술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용기 있는 결단과 실천의 몫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인간적인 삶을 꿈꾸며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림책과 애니메이션
   

「돼지책」 글ㆍ그림 앤서니 브라운/허은미 옮김/웅진닷컴

「종이 봉지 공주」로버트 문치 글ㆍ마이클 마첸코 그림/김태희 옮김/비룡소

<프린스 앤 프린세스> 감독:미셀 오슬로

심유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2-03 13:46


심유정 자유기고가 pupp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