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끼 발산하며 진정한 연기파로 거듭 나

[스타탐구] 김상경

내면의 끼 발산하며 진정한 연기파로 거듭 나

홍상수 감독이 김상경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의 느낌은 “글쎄”였다. 반듯한 범생이인 그를 데리고 일상의 단면이 면도날에 벤 상처처럼 그대로 드러나는 <생활의 발견>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어라? 막상 완성된 영화의 뚜껑을 열어보니 이전의 김상경이 아니다. 10㎏ 정도 불린 몸매로 줄담배를 피워가며 여자 꼬시기에 바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대중들은 <생활의 발견>은 곧 배우 <김상경의 발견>이라고 극찬했다.

사실 그전까지 그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엘리트’였다. 시쳇말로는 ‘범생이’. 주로 맡은 역할만 봐도 그렇다. 데뷔작인 <애드버킷>에서는 송윤아를 사랑하는 후배 검사로, <왕초>에서는 경성제대 출신의 항일 지식인으로, <마지막 전쟁>에서는 법대 출신의 기업 컨설턴트로, <메디컬 센터>에서는 의사로 출연했다.

작품마다 성격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죄다 전문직에, 어깨 힘들어 가는 역할이었다. 허나 배우에게 범생이라 함은 곧 캐릭터의 색맹을 의미한다. 관객은 문제아에 더 관심을 보이는 법. 사석에서의 그를 보면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고자 하는 노력이 역력했다.

“저도 술 마시고 흐트러지는 연기, 잘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안 시키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딱딱하고 무겁게 보이나요?” 당시 그는 자신의 범생이 이미지를 연기력 부족으로 돌렸지만 이는 곧 지나친 겸손임이 증명됐다.

미국의 범생이 해리슨 포드가 내내 조용히 연기하다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를 통해 일약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유명 배우로 거듭났듯 영화로 범위를 넓힌 김상경은 그간 감추었던 내면의 숨은 끼를 마음껏 펼치며 진정한 연기자로 발돋음하고 있다.


연기하다 죽자는 각오로 입문

배우를 생각하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우연히 본 연극 때문이다. 그 연극에 감동받아 집에 와 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의 주먹이 먼저 날라 왔다. 허나 물러 설 수 없는 법.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하며 겨우 부모를 설득해 기어이 연극영화과를 갔고,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다.

대학시절 이미 13편의 연극에 출연했고, 두 번만 들으면 되는 ‘연극 제작’ 수업을 네 번이나 듣는 바람에 졸업이 한 학기 늦어진 일화도 있다. 사람의 발성법을 연구하기 위해 친구들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해 집에 와서 들어보는 유난을 떨기도 했다. 모두 다 제대로 된 연기를 해보고픈 그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연기하다 죽자는 생각으로 매달렸어요. 이왕 이 길로 들어선 것,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물론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잘해보려고 발버둥쳤죠.”

홍상수 감독이 소개시켜 준 봉준호 감독을 만난 뒤로 김상경이라는 이름은 더욱 큰 후광을 발휘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당대 최고의 배우 송강호와 호흡을 맞춘 그는 오로지 ‘서류를 믿는’ 서울형사 서태윤 역을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취조실에서 유력한 용의자 박해일을 앞에 두고 알리바이를 추궁하는 신은 날카로우면서도 강렬한 눈빛 연기가 압권이었다.

결국 나중에는 둘 다 미쳐가지만 육감에 의존하는 시골형사 박두만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작품을 끌어갔다. “꼼꼼하고 논리적이며 증거를 중시하는 서태윤의 성격을 부각시켰죠. 영화를 좀 자세히 보면 서태윤은 자장면 시킬 때도 자장하고 면은 따로 달라고 해요. 아주 치밀하죠.”

<살인의 추억>을 찍고 나서는 정말 많은 영화사와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 자유롭게 운동도 하고 술도 마시며 말 그대로 쉬었다. 평소 못 읽었던 책도 실컷 읽으면서 말이다.

그는 취기가 오르면 하얀 얼굴이 아기처럼 복숭아 빛이 된다. 외양은 차가워 보일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덤벙대기도 잘 하고 유머러스하다. 또 특전사 출신답게 만능 스포츠맨인데 골프, 수상스키, 패러글라이딩, 산악자전거, 승마까지 못 하는 운동이 없다. “언제 무슨 연기를 할지 모르니 미리미리 배워두려고 해요. 틈 나는대로 사람들도 많이 만나려고 하고요. 아직은 세상 보는 시야가 좁은 것 같아서요.”

연극으로 시작해 TV로 얼굴을 알리고 이제는 영화에 발을 깊숙이 담갔지만 자신의 활동 무대를 한정 지을 생각은 없다. “TV 하던 사람들, 죄다 영화로 몰려가서 다시 안 돌아오던데, 그게 웃기는 거죠. 전 작품만 좋다면 TV도 하고 영화도 할 거에요. 연극도 꼭 다시 하고 싶고요.”


'풀 옵션 배우'를 꿈꾸는 고집쟁이

최근 그가 차기작으로 결정한 영화는 <내 남자의 로맨스>라는 로맨틱 코미디물. 스물 아홉 노처녀(김정은)의 유일한 희망인 남자친구가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의 유혹에 넘어가자 이를 지키기 위한 노처녀의 눈물겨운 투쟁이 그려지는데 김상경은 여기서 7년 동안 한 여자만을 묵묵히 사랑하고 지켜주다가 순간의 유혹에 흔들리는 남자친구를 연기한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스토리와 캐릭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하니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스타’ 배우를 ‘연기자’로 재발견하는 일은 늘 신선하고 유쾌한 기억을 동반한다. 잘 생긴 반듯한 청년에서 연기파로 거듭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괜히 신바람이 난다.

연극, 영화의 경계를 무제한으로 누비고 다닌 알 파치노 같은 ‘풀 옵션 배우’가 꿈이라는 욕심많은 배우 김상경. 스스로 많은 것을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하는 그의 현명한 고집이 계속되는 한, 그는 오래도록 사랑받을 배우다.

김미영 자유기고가


김미영 자유기고가 kimkija77@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