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아성 허문 할인점, 인터넷 쇼핑몰 등 대약진으로 지각변동

[유통시장 무한경쟁시대] 유통전쟁, 이젠 서바이벌 경쟁
백화점 아성 허문 할인점, 인터넷 쇼핑몰 등 대약진으로 지각변동

1930년 서울 도심에 국내 1호 백화점인 신세계백화점이 세워진 이래 국내 유통업은 곧 백화점 업계로 대변됐다. 그리 오래지 않은,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경쟁자라면 동네 구멍 가게나 재래 시장이 유일했다. 소비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백화점은 부유층의 전유물일 뿐이었고, 서민들로서는 1년에 한 번 백화점을 찾는 것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유통 산업에 다변화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전후였다. 영세한 구멍 가게 대신 24시간 영업을 무기로 내세운 기업형 편의점이 89년부터 동네 골목 골목을 파고 들기 시작했고, 백화점의 규모와 재래 시장의 저렴함을 동시에 갖춘 대형 할인점이 93년 첫 선을 보였다.

90년대 후반, 유통 업계에 2차 격변기가 찾아왔다. 케이블TV의 성장에 힘입어 홈쇼핑이라는 새로운 업태가 등장했고, 인터넷 사용 확산에 따라 사이버 공간에 인터넷 쇼핑몰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판매 채널 혁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다단계 업체가 급속히 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유통업계 격변에는 ‘5년 주기’라는 공식이 있는 것일까. 2003년 유통 업계는 1, 2차 격변기와는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앞선 격변기가 신규 업태의 등장에 따른 것이었다면, 2003년의 유통 전쟁은 업계 전반이 시장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시장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데서 비롯됐다.

유통 전쟁은 불과 10년 역사의 할인점이 74년 역사의 백화점 아성을 무너뜨리면서 시작됐다. 지난해 백화점 매출을 턱밑까지 추격했던 할인점은 올들어 8월까지 12조4,00억원 어치를 팔아치우며 드디어 백화점(10조9,000억원)의 규모를 앞질렀다. 다른 유통 업태들의 약진도 눈부시다.

올 매출액 예상 규모는 인터넷 쇼핑몰 7조2,000억원, 홈쇼핑 5조6,000억원, 편의점 3조8,000억원 등. 이미 정체의 조짐을 보이는 할인점, 백화점과 달리 이들 업태들은 극심한 소비 침체 속에서도 매년 30~40%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향후 뜨거운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업태간 경쟁보다 더 치열한 것은 유통 재벌들간의 경쟁이다. “가지가 달라도 몸통은 같은 경우가 대부분”인 탓이다. 유통업계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롯데의 경우 롯데백화점을 필두로 롯데마트(할인점), 롯데닷컴(인터넷 쇼핑몰), 세븐일레븐(편의점) 등 홈쇼핑을 제외한 모든 업태에 가지를 뻗고 있다.

롯데 뿐 아니라 신세계(신세계백화점, 이마트, 신세계몰), 현대(현대백화점, 현대홈쇼핑, H몰), LG(LG백화점, LG홈쇼핑, LG이숍, LG25), CJ(CJ홈쇼핑, CJ몰) 등 몇몇 유통 재벌도 유통 시장을 장악했다.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면 스스로 문을 닫아야 하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 부동의 '빅3'

“‘빅3’가 아니면 백화점이라고 부르지도 마라.” 백화점 업계에 농담처럼 떠도는 얘기다. 롯데 현대 신세계가 구축한 ‘빅3’의 영향력이 갈수록 확대되는 데서 나온 말이다. 지난해 이들 3개사의 시장 점유율은 74% 가량. 매년 1~2%포인트씩 점유율을 확대해 나가는 추세다.

이는 부유층을 주고객으로 하는 백화점의 특성상 ‘브랜드 파워’가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인 탓. 제조 업체들의 입장에서는 브랜드 파워가 높은 백화점에 입점을 원하고, 백화점들은 무수한 신청자 중에서 최고의 상품만을 입점시킨다. 소비자가 대형 백화점을 선호하는 이유다.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의 확대 재생산이다. 특히 이들 ‘빅3’는 최근 매장수를 급속히 늘려가며 그나마 몇몇 지방 도시를 장악해왔던 중소형 백화점마저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빅3’ 내부의 서열도 확고부동하다. 부동의 1위인 롯데가 지난해 40.6%(매출액 7조2,276억원)의 점유율을 보였고, 현대가 그 절반 가량인 21.0%(3조7,442억원), 신세계가 다시 절반을 조금 넘는 12.5%(2조2,257억원)를 기록했다. 1~2%포인트 정도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좀처럼 순위의 역전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매장 수에서도 롯데 21개, 현대 13개, 신세계 7개 등으로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하지만 백화점 업계는 외부로부터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할인점을 필두로 홈쇼핑, 인터넷 쇼핑몰 등 타 업계가 전방위 공세를 펴면서 백화점 업계가 나눠 먹을 수 있는 파이 자체가 줄어든 탓이다.

최근 2년간 업계의 과당 경쟁 우려에 따라 폐지했던 겨울 세일을 올해 다시 도입한 것도 극심한 소비 침체 탓이기도 하지만, 할인점 등 다른 유통 업태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짙다.

‘빅3’ 내부에서 희비도 엇갈린다. 날씨로 표현하자면 ‘신세계 맑음, 롯데 흐림, 현대 비’로 압축된다. 이마트를 보유하고 있는 신세계는 백화점의 파이가 줄어들고 할인점의 파이가 늘어나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

반면 할인점 사업에 진출하지 못한 현대나 롯데마트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고 있는 롯데는 이같은 환경 변화가 달가울 리가 없다. 1, 2위에 비해 오히려 3위 업체가 더 느긋함을 보이는 기이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할인점 - 치열한 2위 다툼

할인점은 11월로 정확히 출범 10년을 맞았다. 93년 11월 서울 도봉구 창동에 국내 최초의 할인점 이마트가 출범하면서 시작된 할인점은 국내 유통 업계에 ‘가격 파괴’ 바람을 몰고 왔다.

95년 17개 점포에 8,000억원 매출에 불과했던 할인점 업계는 97년 3조4,000억원(58개점), 99년 7조6,000억원(107개점), 2001년 13조8,000억원(192개점) 등 매년 30~40%의 놀라운 신장을 기록했다. 그리고 올해, 8월까지 70개점에서 12조4,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백화점을 제치고 유통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했다.

할인점 성공 신화의 으뜸 주역은 단연 선발 주자인 이마트다. 점포수(58개)와 매출액(2002년 4조6,581억원) 등에서 2위권을 두 배 이상 앞서며 독주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마트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최대 비결은 우수한 부지 선점과 막강한 ‘바잉 파워(Buying Power)’, 그리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한 고객 서비스 강화. 이마트 관계자는 “2007년에 100개 이상의 전국적인 다점포 네트워크를 구축해 대한민국 1등 할인점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할인점 업계 경쟁의 관전 포인트는 오히려 2위 다툼이다. 98년 할인점 사업에 뛰어들어 공격적으로 점포를 확장한 롯데쇼핑의 롯데마트와 수도권 외곽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삼성테스코 홈플러스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롯데마트의 경우 하향세가 두드러지고 반대로 홈플러스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

매년 6~7개의 점포를 신설하며 공세를 편 롯데마트는 지난해 이후 점포수 30개에서 정체 상태에 있는 반면, 홈플러스는 올해에만 7개 점포를 신설하며 28개로 롯데마트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매출 면에서도 홈플러스가 점포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2조1,468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롯데마트를 근소한 차이로 제쳤다.

특히 점포당 매출이 5억원을 넘어서며 점포 효율 면에서는 1등 업체인 이마트마저 앞서고 있다. 한편 까르푸와 월마트 등 세계적인 할인점들은 지난해 매출액이 각각 1조3,700억원, 7,400억원으로 4, 5위에 머물며 국내 시장에서 자존심을 완전히 구겼다.


홈쇼핑- 후발 업체들의 분전

홈쇼핑은 늘 부작용 때문에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렸다. TV를 보다 충동 구매를 일삼는 ‘홈쇼핑 중독자’들이 양산됐고, “매진 임박했습니다”로 대표되는 과장 광고도 늘 시비거리가 됐다. 하지만 이는 곧 홈쇼핑 업계 급성장의 한 단면. 홈쇼핑은 지금껏 ‘불황을 모르는 업종’의 대표 주자로 꼽혀 왔다.

하지만 소비 침체가 지속되면서 홈쇼핑 업계의 고도 성장에도 제동이 걸렸다. 3분기까지 홈쇼핑 5사의 판매증가율은 8.6%. 전년도 120% 성장을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제자리 걸음 수준이다. 특히 케이블TV 신규 가입자수가 정체되면서 3분기에는 마이너스 성장(-0.5%)을 기록하는 등 갈수록 사정이 나빠지는 추세다.

주목할만한 것은 LG홈쇼핑과 CJ홈쇼핑 등 선발 상위 2개사의 경우 하락세가 두드러진 반면, 현대홈쇼핑을 필두로 우리홈쇼핑, 농수산방송 등 후발 하위 3사는 불황 속에서도 꾸준히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 LG와 CJ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1분기 각각 47.4%, 34.8%에서 올 3분기 36.3%, 30.3%로 하락했고, 나머지 3개사는 이 기간 3~7%포인트 점유율이 상승했다.

하위사 중에서도 최근 업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행보를 보이는 곳은 현대홈쇼핑. 중고생 어학연수 프로그램, 미 명문대 인턴십 상품과 취업 상품, 교환학생 프로그램, 금강산 관광 상품에 이어 최근 화제를 몰고 온 캐나다 이민 상품까지 각종 아이디어 서비스 상품을 개발해 인지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지난해 1분기 7.0%에 불과했던 시장점유율이 올 3분기에는 2배가 넘는 14.9%까지 상승, 선발 주자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 - 불붙은 외형 경쟁

유통업계를 통틀어 1위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인터넷 쇼핑몰 분야다. 인터파크는 최근 ‘인터넷 쇼핑 1세대 부활’이라는 자료를 내고 8, 9월 월간 판매 총액이 각각 365억원, 355억원으로 LG이숍을 따돌리고 업계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3분기에는 만성 적자에서 3억원의 흑자로 돌아섰다고 밝혔다.

그간 업계 1위를 호령해왔던 LG이숍은 발끈했다. LG이숍측이 공개한 자료는 9월까지 누적 판매 총액. 3001억원으로 2,686억원의 인터파크를 여전히 앞서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가다 실제 수익 지표인 매출액(판매 수수료 총액)에서는 594억원으로 인터파크(254억원)를 두 배 이상 앞지르고 있다고 반발했다.

향후 매출과 직결될 수 있는 방문자 수를 두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온라인 순위 사이트인 랭키닷컴에 따르면 인터파크는 최근 4주간 방문자 수에서 LG이숍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인터파크측은 “방문자 수 증가가 매출 증가로 이어진 것”이라고 자평한다.

반면 줄곧 1, 2위를 달려오다 추월 당한 LG이숍과 CJ몰은 “방문자 수는 조사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실제 매출과 직결되는 페이지뷰에서는 여전히 인터파크가 뒤처진다”고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만큼 인터넷 쇼핑몰 시장의 경쟁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다는 점. LG이숍과 인터파크, CJ몰이 3강 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다음, H몰, 롯데닷컴, 삼성몰, 한솔CSN 등 중위권 역시 외형 경쟁에 동참하며 실적 확대에 혈안이 돼 있다. 과열 경쟁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아직 사업의 수익성이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외형 경쟁에 치중할 경우 업계가 제대로 성장도 하기 전에 공멸할 수 있다”며 “무분별한 외형 경쟁에서 벗어나 쇼핑몰의 질을 높여야 업계가 시장 파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편의점 - 엎치락뒤치락 1위 전쟁

서로가 1등이라고 외쳐대기는 편의점 업계도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훼미리마트, LG25, 세븐일레븐 등 3사는 해가 바뀔 때마다 순위를 바꾸며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는 공산품 판매에 그치지 않고 공공요금 납부, ATM 이용, 휴대폰 충전, 그리고 택배까지 다양한 생활 편의 서비스를 앞 다퉈 제공하며 1위 등극에 혈안이 돼 있다.

현재 점포 수에서 가장 우위를 보이고 있는 곳은 보광 훼미리마트. 9월말 현재 1,970개로 LG25(1,469개)와 세븐일레븐(1,339개)을 500개 이상 앞지르고 있다. 2001년말 롯데 계열 세븐일레븐이 먼저 1,000호점을 돌파했지만 올 들어 훼미리마트가 무서운 기세로 점포수를 늘려 나간 결과였다.

이에 대해 LG25와 세븐일레븐측은 무의미한 수치라고 일축한다. “편의점 창업 수요 폭증으로 점포수를 늘리려면 얼마든 늘릴 수 있지만, 본사의 무모한 과다 출점은 가맹점의 수익성 악화만을 초래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세븐일레븐의 경우, 지난해말 1,403개점에서 9월말 현재 1,339개점으로 점포수가 줄어든 것도 부실 점포를 과감하게 정리한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매출액에서는 LG25와 훼미리마트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정확한 통계치가 없는 상황에서 양사는 지난해 7,000억원 초반대 매출로 상대방을 1,000억원 가량 앞질렀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는 상황. 특히 LG25측은 실제 경영 효율성을 나타내는 점포당 하루 평균 매출액에서 자사가 216만원으로 185만원의 훼미리마트를 크게 앞섰다고 주장한다.

세븐일레븐은 “혼탁한 경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최근 매출액 공개를 꺼리고 있다. 현재 3사 모두 올해 1조원 매출 돌파를 공언하고 있는 상태. 연말이 지나면 3사의 실적을 두고 또 한번 치열한 공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2-05 14:11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