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문학에 비춰진 시대상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이 메일을 보내왔다. 안부 인사와 함께 공대생의 교양을 위해 읽을 만한 소설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 곁들여진 메일이었다. 전공 공부 때문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문학적 교양을 보충하면서 한 해를 정리하고 싶다는 균형감각이 발휘된 것이리라. 어떤 책이 좋을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올해에도 여러 좋은 작품들이 새롭게 나타나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했다. 많은 작품 중에서 몇 편을 선택해서 추천하는 일이란 언제나 부담스러운 작업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일을 보내온 학생에게 추천한 작품은 성석제의 ‘인감의 힘’, 김영하의 ‘검은꽃’,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그리고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슈퍼스타즈’) 등이다. 어느 작품을 읽더라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간의 힘’은 한국판 돈 키호테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선비 채동구의 진지하면서도 허망한 삶을 통해서 인간다움이라는 가치를 탐색한 작품이며,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결혼식에서 있었던 사소한 장면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문화적 무의식을 섬세한 구성과 감각적인 문체로 제시하는 유쾌한 소설이다.

‘검은꽃’이 1905년 멕시코로 이주했던 애니깽들의 삶에 드리워진 운명의 표정을 담아낸 새로운 형식의 역사소설이라면, ‘슈퍼스타즈’는 초창기 프로야구에 대한 기억 속에서 1980년대의 시대적 의미를 새롭게 읽어낸 흥미로운 성장소설이다.

또한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여성적 욕망과 자본주의 체제 사이에서 펼쳐지는 공모와 일탈의 드라마들을 도발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보여준다. 거론한 작품들을 모두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검은꽃’과 ‘슈퍼스타즈’를 통해서 2003년 한국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김영하는 친숙한 대상을 낯설게 변모시키는 탁월한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아무리 상투적인 소재라도 그의 손끝을 거치게 되면 새로운 이야기로 둔갑해서 나타난다. ‘검은꽃’은 1905년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 에너켄 농장으로 이민을 떠났던 1,033명의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 중에서 42명의 조선인들은 과테말라의 북부 밀림에 신대한을 국호로 내건 나라를 세웠지만,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고 관련 기록이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검은꽃’의 새로움은 두 가지의 차원에서 확인된다. 하나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개인의 내밀한 심리와 삶의 궤적들, 가족의 역사, 사회와 시대, 민족 이야기 등에 주목한다. 반면에 소설에서 국가를 사유하는 일은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소설을 통해서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사유하는 것, 그 자체가 새로움이다. 또 다른 특징은 이 작품이 이름 없는 개인들의 역사를 치밀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소설에서 주인공은 영웅이거나 영웅의 면모를 지닌 사람인 경우가 많은데, ‘검은꽃’에서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라 개별적인 개인들이다. 근대적인 개인이 출현하는 역사적인 과정과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간 개인들의 운명을 추적하는 일은 그 자체로 문학적 실험에 해당한다.

‘슈퍼스타즈’는 1970년대에 유년기를, 그리고 1980년에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세대들의 기억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지적에 의하면, 1980년대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말은 ‘프로’와 ‘섹시’이다.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우리의 미시적 일상에까지 파고든 자본주의를 웅변하는 시대적인 상징이다.

또한 당시에 인기를 끌었던 놀란즈의 노래 섹시 뮤직은, 한국사회에서 욕망의 무한궤도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표상이다. 1980년대는 프로를 통해서 자본주의적인 심성을 배양했고 섹시를 통해서 욕망의 운동성을 표출하기 시작한 시대인 것이다.

1980년대와 관련된 종전의 인식이 정치적 억압과 해방의 투쟁으로 집약되는 것이었다면, 박민규의 소설은 또 다른 차원에서 1980년대의 보다 내밀한 생활 감각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역사는 그 당시 한국시리즈에서 1위를 했던 OB 베어즈를 기록하겠지만, 문학은 1982년 후반기에 5승 35패를 거둬 승률 1할 2푼 5리를 기록했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한다. 문득 1983년에 혼자서 30승을 거두었던 삼미의 투수 ‘너구리’ 장명부의 근황이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2-09 14:56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