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미술의 하모니] 보이는 음악, 들리는 그림 ⑤ 베토벤과 고야프랑스혁명 시기 살았던 두 예술가 청각장애 고통 작품으로 승화

일반적으로 음악은 귀로 듣고 그림은 눈으로 본다. 하지만 음악을 보고 그림을 들을 수는 없을까? 예술에선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비슷한 말을 하는 음악과 미술을 접하게 된다. 어? 이번엔 말을 한다고? 그렇다.

음악과 미술은 언어가 아닌 다른 표현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동시대를 산 서로 비슷한 메시지를 전한 화가와 작곡가를 찾아 그들이 그 시대를 살면서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베토벤과 고야, 혁명의 시기를 살았던 두 예술가는 그들의 작품으로 예술계의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당시 유럽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었다. 프랑스의 혁명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생겨났고 시민들은 자유를 부르짖었다. 이 가운데 베토벤과 고야는 각자의 분야에서 기존의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들어서는 첫 발을 내딛는다.

1-베토벤. 2-고야. 3-고야 '1808년 5월 3일'. 4-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자필 악보. 5-베토벤 악보. 6-베토벤 푸가 악보

혁명의 예술, 베토벤과 고야

베토벤은 모차르트나 하이든과는 달리 극과 극의 감정을 표현해냈다. 기존의 음악은 피아노와 포르테간의 일정 간격을 유지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강약의 변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음악은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요하는 경우가 많다. 악장이 길고 관현악 곡의 경우 구성 자체가 방대하다. 불협화음의 사용과 강약의 다양한 변화 등 많은 요소가 듣는 이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의 관중들은 이런 음악에 익숙하지 않았다. 불협화음은 생소한 것이었고 멜로디가 제한적이었던 베토벤의 음악은 따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베토벤의 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음악이다. 당시의 관중은 이런 음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기이’하고 ‘광적인’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음악은 과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고야의 그림은 또 어떠한가. 고야의 작품은 기존의 그림들과는 달리 아름답지 않다. 그의 그림은 공포와 긴장감, 두려움과 혼동을 나타낸다. 그는 무시무시함과 잔인함, 피와 뜯겨나간 살점을 그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고야 작품의 모티프는 인간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비난이며 세상에 대한 분노와 폭력에 대한 폭로다.

베토벤의 음악처럼 그의 그림은 더 이상 보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베토벤의 음악처럼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그림인 셈이다. 이점에서 고야의 그림 역시 혁명적인 것이었다.

변화하는 예술 세계

그들은 처음부터 위와 같은 혁명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초기 작품은 고전음악과 로코코 회화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둘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통틀어 변화한 그들의 작품 세계였다.

고야의 ‘빨래하는 여인들’과 같은 초기 작품들은 로코코 미술의 특징인 밝고 행복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평온한 자연과 더불어 여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베토벤의 초기 작품 역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아 소나타 형식에 충실하고 듣기 편하고 차분한 음악을 만든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이들의 예술세계는 변하기 시작한다. 베토벤의 혁명적 작곡은 그의 세 번째 교향곡 ‘영웅’에서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곡은 당시에는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제1악장은 15분에 달하는 긴 악장으로 기존 교향곡의 전 악장을 합쳐놓은 것만큼 긴 길이였다.

이 작품으로 베토벤은 낭만주의의 시초를 확고히 했다. 이 작품은 당시 베토벤이 칭송했던 프랑스 혁명의 영웅 나폴레옹에게 헌정됐다. 그러나 추후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나폴레옹의 이름이 적힌 악보를 찢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바꿀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베토벤의 심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고야 역시 비슷한 시기에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군단의 스페인 침략 당시 그들의 잔인함을 그린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에서 프랑스 군대의 잔인함을 비난한다. 이 작품에서는 고야의 초기 작품 성향인 로코코 양식은 찾아볼 수 없다. 고야는 이 참혹한 현장을 실제로 목격하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한다. 어두운 밤에 일어난 이 사건은 언덕 아래에 등불을 켜놓고 처형을 실행하고 있다.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 속의 사람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공포에 떠는 모습이다. 중간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듯 두 팔을 벌리고 빛을 발하고 있다. 고야는 이 작품을 만들 때 물감대신 자신의 피를 그림에 직접 발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전쟁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을 대변하는 일화이다.

7-베토벤 마스크. 8-고야 'Saturn Devouring One of His Children'. 9-고야 '보르도의 우유 파는 여인'. 10-고야 '숙명'

내면 고통을 예술로 승화

이렇듯 그들의 작품세계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였는데 이것 외에도 그들의 광적이며 독립적인 작품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청각장애에 있었다. 베토벤은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인 26~28세에 청각을 잃기 시작해서 38세에는 완전히 청각을 잃는다.

고야 또한 47세에 심한 열병을 앓고 난 뒤 청각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청각장애는 내면의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이러한 내면의 고통과 충돌을 스포르잔도, 포르테피아노 등 여러 가지 음악적 테크닉을 이용해 표현하고 있다. 또한 고야의 후기 작품인 ‘검은 그림’들은 이러한 내면의 고통을 무시무시한 장면들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작가의 신체적 장애와 불안한 사회 현상은 이들로 하여금 인간의 내면을 더욱 더 적나라하고 심도 있게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 고야의 ‘사투르누스’는 그가 말기에 살았던 그의 집 ‘귀머거리의 집’의 벽에 그린 ‘검은 그림’연작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고야의 권력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자식을 잡아먹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신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는다는 의미를 지니며 스페인을 침공한 프랑스를 빗대어 그린 작품이다. 이 외에도 그는 그의 집을 ‘곤봉 결투’, ‘모래 늪의 개’, ‘성 이시드로의 축제’, ‘숙명’, ‘두 노인’ 등 무시무시하고 어두우며 섬뜩한 그림들로 채웠다.

베토벤의 말기 작품인 현악 사중주(op. 133, Grosse Fuge)는 고야의 ‘검은 그림’처럼 그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이 곡은 현대에 와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곡이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나왔다가 갑자기 어두운 분위기로 전환하는가 하면 갑자기 소리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무드의 변화가 심하다. 반복적인 리듬을 통해 오랫동안 긴장감을 고조 시키다 갑자기 우울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베토벤의 광적인 정신상태를 반영한 듯 극도의 불안함을 표현하다가 한 순간 평온함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대조적인 모습은 고야의 말기작품 세계와도 흡사하다. 앞서 언급한 ‘검은 그림’ 연작 외에 고야는 그의 말기에 ‘보르도의 우유 파는 여인’이란 작품을 남겼는데 무시무시하고 섬?한 그림을 그렸던 그의 ‘검은 그림’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렇듯 상반되는 감정들을 표현하며 그들의 인생에서의 불안함과 긴장감, 그리고 아름다움과 희망의 사이를 넘나들었던 그들이 진정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내면의 모습이었다.

베토벤과 고야. 두 예술가 모두 청각장애라는 어려움을 안고 세상의 모든 소리에서 고립된 외로운 인생을 살아갔지만 사회의 소용돌이 안에서 그들이 느끼고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과감하게 그들의 작품에 담아내며 사회에 메시지를 던졌다. 그들의 대범하고도 심지 있는 모습에서 시대의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본다.



노엘라 / 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 칼럼니스트 violinoella@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