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환상적 화풍 많은 작가에 영향… '태고의 날들'등 60여점 선보여

“그는 심연의 바닥을 나누기 위해 선과 다림줄을 만들었다./ 그는 분할의 규칙을 만들었다./ … 그는 무게를 재기 위한 저울을 만들었다./ 그는 육중한 중량을 만들었다./ … 그는 황금 컴퍼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심연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화가이자 낭만주의를 이끌었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유리즌의 첫번째 시(The First Book of Urizen)>(1794)라는 작품이다.

블레이크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수수께끼처럼 파격적인 화풍으로 신비롭고 복잡한 상징성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 판화가이자 삽화가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비록 당시에는 블레이크의 독특한 작업세계가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현대에 와서 유럽 대륙과는 차별되는 영국미술의 독특한 흐름을 예고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서울대미술관(MoA)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과 그의 작품이 미술계에 끼친 영향을 조명하는 전시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을 내년 2월 14일까지 개최한다.

전시에서는 인물의 장엄함이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신체의 입체감을 화면 구성에 활용하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표방한 블레이크의 대표작 <태고의 날들(The Days of Ancient)>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블레이크의 비범한 우주론에 입각해 탄생한 이 작품은 거대한 천상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인물은 블레이크의 예언서에 등장하는 유리즌(Urizen)과 연결시켜 해석되기도 한다. <태고의 날들>과 함께 밀튼의 송시 <그리도의 탄생일 아침에>(1630)를 기리며 블레이크가 1809년에 제작한 6개의 삽화 시리즈 중 하나인 <아폴로 사원: 밀턴의 송시 ‘그리스도 탄생일 아침에’>도 소개가 된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해 이교신들이 추방당한 후 자신의 사원에서 더 이상 신탁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처연한 아폴로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뉴튼>, <태고의 날들>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인 정면성과 대칭적인 구성이 상징적 회화나 중세 말의 문장 디자인을 연상시키고 있다. 블레이크의 이러한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시각화는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작가와 디자이너, 사상가들을 매료시켰다.

블레이크의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 작가 퓨슬리(Johann Heinrich Fuseli)와 플랙스먼(John Flaxman)의 낭만주의 작품, 빅토리아 시기의 작가 와츠(George Frederic Watts), 밀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 브라운(Ford Madox Brown) 등의 문학적 회화와 판화, 20세기 작가 콜린즈(Cecil Collins)와 아뉘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신비주의적 작품까지 이번 전시를 통해 영국 미술사를 주도한 총 60여 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을 관통하고 있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화풍, 문학적 상징성, 미술과 디자인의 결합 등은 200여 년 동안 블레이크가 걸어온 발자취이자 그가 남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 위트워스 갤러리와 함께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전시를 기획한 서울대미술관의 김진아 학예실장은 “화가이자 판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면모를 조망하는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며 “블레이크와 더불어 2세기에 걸친 영국의 대표 미술가들의 실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고 전시의 의미를 밝혔다.



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