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라디오 문화의 변화배구공캐릭터 기계음으로 '올댓차트' 진행 동시간대 청취율 1위

“안녕하세요. 윌슨 라인 여러분, 잘 살아 있었나요”

새벽 2시, 기괴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뉴스에나 나올법한 음성변조에 가깝다. ‘히트’한 문화방송(MBC)의 미스터리 드라마 에 나왔던 악마 목소리와 흡사하게 비튼 목소리다. 방송사고가 아닌지 착각할 정도다.

매일 오전 2시부터 3시까지 한국방송(KBS) COOL FM(89.1MHz)에서 방송하는 <올댓차트>에 나오는 사이버 DJ ‘윌슨’의 목소리다. 사람 목소리가 아닌 기계음이 라디오에서 동시간대 점유율 40%로 청취율 1위(KBS 자체집계)를 기록하는 등 나날이 인기몰이를 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기괴하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변조음을 연상케 하는 기계음에 빠져든 심야시간대 청취자들이 몰려들었다. 한국방송 자체조사 결과이기는 하지만 한국방송 내 라디오 채널만 5개가 넘는다는 점만 봐도 놀랄만하다.

■ 청취자, 예상외의 '호감' 반응

작년 10월 방송을 시작해 청취자의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이 방송은 예상외의 호응을 얻으면서 1년 넘게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다. 청취자 류승민 씨는 한국방송 라디오 콩 게시판에 “기계음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꿈에 나올까 두려웠다”면서도 “기계음 같지 않게 일정부분 감정을 가지고 있어 팬이 됐다”고 적었다.

인터넷 사이트 ‘네이버’에는 이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인 윤성현(31) PD와 <올댓차트>의 팬카페까지 생겼다. “느끼하다”, “무섭다”, “괴기스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던 초창기와 대조적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안티카페가 생겨나기도 했었다.

<올댓차트> 청취자 김 아무개(25.여) 씨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새벽시간에 쭉 틀어놓고 듣는다”며 “잠을 확실히 깨워줘 즐겨 듣는다”고 말했다. 청취자 김고은 씨는 한국방송 라디오 콩 게시판에 “항상 무료하고 길었던 새벽시간에 까칠한 멘트에 꽂혔다”며 “어떻게 배구공일 수 있니”라고 썼다.

■ 기계음 '윌슨'은 왜 먹히나

기계음 ‘윌슨’의 성공 비결은‘역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기계음으로 인한 ‘거리 두기’가 오히려 청취자와의 거리감을 좁힌다는 지적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약간이라도 긴장하면 모든 게 불편해지는 것처럼 인간은 작은 것에서 편함과 불편함을 느끼는 존재”라며 “자신의 이미지 등을 의식하지 않고 얘기하는 화자나 청자 모두 어떤 말이든 나눌 수 있는 편안함을 느낀다고 보여진다”고 말했다.

연예인이나 아나운서가 정제된 말투로 상투적인 ‘멘트’를 하는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이 주효했다는 뜻이다. ‘탈권위’가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가식’보다는 ‘독설’을 하는 ‘나쁜 남자’ 콘셉트 역시 효과를 톡톡히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공부가 잘 안된다”는 청취자에게 윌슨은 기계음으로 “공부를 안해서 안되는 것 아니냐”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가수 성시경이 문화방송(MBC) FM4U ‘푸른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91.9Mhz)에서 늘 “잘자요”라고 인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사이버 DJ 윌슨은 “살아 남으세요. 저도 살아남을게요”라고 끝인사 한다. 윌슨은 “나는 여심의 블랙홀, 사이버 DJ계의 거성, 21세기의 라디오 스타, 소녀들의 대통령”이라고 얘기하며 거침없이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곽 교수는 “착하고 도덕적인 것을 별 볼일 없어 보이고 재미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분위기가 있다”며 “우리가 추구하는 착함이나 훌륭함, 도덕성, 완벽함보다 전체적으로 지금 세대들은 특이한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성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 긍정 vs. 부정, '윌슨 효과'

기계음으로 진행하는 <올댓차트>는 ‘윌슨 효과(Wilson Effect)’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양면적 여파를 예상하게 한다.

곽금주 교수는 “강압적 규제나 지시가 많은 사회분위기가 있다면 반발을 다른 쪽으로 해소하려 더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심리가 생기기 마련”이라며 “이런 현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큰 자극을 추구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완 <미디어스> 북 에디터는 “라디오는 매체 특성상 소수성을 띠게 마련이므로 채널선택권을 늘리고 매체의 엄숙주의를 탈피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며 “공영방송이라고 해서 일상언어와 다른 방송언어만 쓰는 프로그램만 있으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

김 에디터는 이어 “거부감 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제작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기계음이 익숙해졌다는 면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