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세기 프랑스 사회사 통해 여성의 모성적 행동 근원 밝혀내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심성은 옮김/ 동녘 펴냄/ 16,000원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예전 어느 TV광고에서 말한 적이 있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의 가변성을 '움직인다'라는 안성맞춤의 표현으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은 오묘하고 모호해서 한 가지로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지구상에는 인구 숫자만큼의 사랑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 꼽히는 모성애는 일반적인 사랑과는 차별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 어떤 사랑과도 다른 확고부동함, 순결함, 헌신성, 무조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성애는 마치 절대불변의 섭리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가장 숭고한 사랑이자 모든 어머니의 천부적 속성으로 알고 있는 모성애가 만약 사회적 학습 혹은 제도적 세뇌에 따른 결과물이라면 어떻겠는가?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 뿐더러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어머니와 자식의 '피로 연결된 고리'는 선험적(先驗的) 도덕률이자 본능이라고 느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지성계에서 여성주의(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 서온 저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그러나 모성애에 대한 인류의 통념을 가차없이 전복시킨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이기도 한 바댕테르의 주장은 "모성애는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도발적 선언으로 요약된다.

모성애가 만들어졌다니? 도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다는 것일까. 또 그 논거는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바댕테르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17~20세기 프랑스 사회사를 파고들며 여성들의 모성적 행동이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를 추적한다. 저자가 '모성애의 본능설'을 뒤집기 위해 근거로 삼은 대표적인 사례는 18세기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유모 위탁' 관행이다.

당시 여성들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도시 외곽의 유모들에게 보내곤 했다. 언뜻 아이들이 자연환경 속에서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식을 방기한 행위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한 유모의 집에서 두세 명의 아이를 이미 잃었던 여성이 똑같은 유모에게 다시 자녀를 보낸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 그의 반문이다. 어떤 유모는 1년 남짓한 동안 영아 31명을 죽게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당초 모성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댕테르의 결론이다. 사실 저자가 논거로 든 사례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을 내팽개치는(심지어는 살해하는) 어머니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만약 모성애가 모든 여성의 본능이라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본능이 아닌 '이데올로기'로서 모성애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저자는 19세기 들어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에 따른 노동력 수요 증가가 국가로 하여금 여성들에게 모성애를 강요하게 했다고 분석한다. 이후 사회적 학습을 통해 점차 강화된 모성애는 오늘날 '모든 어머니의 본능'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모성애를 19세기 안팎 무렵(적어도 프랑스의 경우에는) 갑자기 불거진 '근대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우리에게로 눈을 돌려봐도 바댕테르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유교사상에 입각한 전통적 가부장 제도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의 역할'은 명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성애의 전복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어차피 모성애는 후천적 소산인 만큼, 여성에게만 자녀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간다. 부성애는 그 하나의 대안이며, 나아가 미래세대를 잘 보살펴 키우는 것은 어떤 특정인만의 몫이 아닌 한 사회 전체의 의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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