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읽기] 드라마 '내조의 여왕'

취업의 고통은 이제 88만원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스펙을 자랑해도, 아무리 뛰어난 처세술이 있어도, 만인을 향한 만인의 취업투쟁이 끝나지 않는 시대가 왔다. ‘내조의 여왕’은 서울대출신 백수남편 온달수(오지호)와 그 아내 천지애(김남주)의 요절복통 취업성공기를 그려낸다.

남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다”이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하고 싶어 한다”이던 시대는 갔다. ‘내조의 여왕’에서 여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돈을 ‘남편이 성공적으로 벌 수 있도록’ 내조하는 기쁨에서 우러나온다. ‘내조’는 여성이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던 시대의 가부장적 권력구조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내조’가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의 주체적 파워’를 상징하는 역설적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내조’는 남편을 향한 수동적 보조가 아니라 남성의 삶을 지휘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급부상한다. ‘내조’는 단지 남편의 그림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 남편이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압도적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남편은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지만 동아리 후배가 사랑을 고백하자 동아리를 탈퇴해버릴 정도로 숙맥이고, 해부학 실습을 하다 구역질을 참지 못해 의대 졸업을 포기해버린 심약함의 소유자다.

결혼후 7년 동안 집에 갖다 준 돈이 천만원이 안 되는 이 반백수 남편을, 아내 천지애는 어떻게든 대기업 ‘퀸스푸드’에 입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마침 그 회사의 인사권을 틀어쥔 남자는 천지애를 짝사랑했던 남자이고 그의 아내는 지애의 철천지원수 여고동창 양봉순(이혜영)이다.

봉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애는 기꺼이 과거의 왕관을 헌납하고 무릎을 꿇는다. “옛날엔 네가 내 시녀였지만 이젠 내가 네 시녀할게.”

여기까진 어째 좀 진부하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이 상투적인 구조를 뒤트는 캐릭터들의 리얼한 상황 돌파방식이다. 간신히 인턴으로 조건부 입사한 ‘퀸스푸드’에서 남편이 맡는 역할은 늘 복사나 커피 심부름이다. “서울대 나왔다 그랬지? 드디어 자네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어!”라는 상사의 달콤한 유혹에 홀려 따라가 보면 어이없는 미션이 대기 중이다.

“점심 내기 사다리 좀 그려줘. 아무도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게, 수학적으로!” 유치원비가 없어 집에서 뒹구는 어린 딸에게 자장면을 사주고 싶어도 집안 구석구석에 떨어진 동전 찾아 삼만리를 떠나야 한다. 침대와 소파를 막대자로 주섬주섬 뒤지자 먼지 뭉치와 함께 부슬부슬 딸려 나오는 100원 짜리들의 리얼함이라니.

그러나 손바닥껍질이 다 까지도록 짝퉁가방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온 천지애의 생존전략은 확고하다. “오늘부터 우리 가훈을 바꾸자. 낮게 나는 새가 먹이를 먹는다! 아니. 날지도 마! 기어! 아니. 기지도 말고 바닥에 들러붙어! 화장실 바닥에 붙은 물 묻은 휴지 알지.

절대 떨어지지 말고 철썩!” 과연 그들은 이 험난한 생존의 전장을 한없이 낮게 몸을 낮추는 림보 자세만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

남편의 신제품개발을 위해 아내는 물론 장모님까지 총출동하고, 상사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명품가방의 짝퉁을 선물하는 천지애의 불철주야 내조는 ‘애교’에 속한다. 죽어라 몸으로 뛰는 와이프 천지애 위에는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와이프 양봉순과 오영숙(나영희)이 있다. 퀸스푸드의 모든 남편들을 졸지에 ‘온달’로 만들어버리는 막강권력의 최고봉에는 ‘평강회’라는 아내들의 친목회가 있다.

평강회의 보스 오영숙은 내조의 여왕 천지애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모술수로 남편을 사장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사장의 충견노릇에 환멸을 느끼는 남편에게 오영숙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늘한 명대사를 날린다. “개 노릇 하는 게 뭐 어려워요? 개가 발등을 핥기만 하는 거 아니잖아요. 비위 틀리면 제 주인 발뒤꿈치를 물어뜯어 피를 보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평강회 부인들의 조직적인 전담 마크로 도저히 취업 전선의 장벽을 뚫을 수 없는 남편을 바라보며 지애는 결단을 내린다. 내조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으니 이젠 구국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당신 나랑 어디 좀 가.” 야산으로 남편을 끌고가 말그대로 ‘삽질’을 시키는 지애.

지애는 이순간만은 평소의 푼수끼를 조용히 접는다. 남편이 판 구덩이 위에 먼저 누워, 아무런 열망 없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부탁한다. “여기 누워봐.” 한참 함께 누워 있던 두 사람은 비로소 아무런 설명 없이 서로를 이해한다. 가상의 무덤 속에 누워 죽음을 체험한 그들은 그 어떤 굴욕도 가족을 잃는 아픔에 비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평소처럼 야단치지 않고 짜증내지 않으니 아내의 옹이진 마음이 더 잘 들린다. “나 살고 싶어. 사는 것처럼 제대로, 나 살고 싶어.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것처럼. 여보.” 이 구슬픈 죽음의 가상연습은 효과만점이다. 온달수는 더 이상 징징거리지 않고 대리운전이든 이삿짐 운반이든 가리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평강회의 그 어떤 전천후 와이프도 따라갈 수 없는 무적의 내조는 바로 천지애의 ‘유머와 내공의 비빔밥 사랑’이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구질구질하지 않고 무식하지만 기죽지 않는다. 신용카드가 한도초과되었을 때는 “아, 카드 마그네슘이 손상되었나봐요.”라고 여유있게 받아치고, 남편을 칭찬할 때는 “원래 잘난 사람들은 튀게 돼 있어. 군대일학이라고 하잖아.”라며 시청자들의 배꼽을 쥐게 한다.

남편의 합격을 기다리며 “아, 나침반은 던져졌는데!”라고 중얼거리고, 타인을 위로할 때는 “너무 힘들어 하지 말아요. 인생사 다홍치마라는데.”라며 상대방을 포복절도시킨다. 평강공주를 꿈꾸는 모든 여성들에게 천지애는 ‘잔머리’나 ‘권모술수’가 아닌 남편을 웃게 만드는 유머와 사랑이 최고의 내조임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너와 나의 스펙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한, 너의 성공과 나의 실패의 질량을 끊임없이 저울질 하는 한, 이 경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애는 무적의 내조 테크닉은 사랑을 멜로보다는 유머로 포장하여 요리하는 연대의 기술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상처 위에 웃으며 공생하고 서로의 눈물 위에 따스한 보금자리를 만든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