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수상자가 동료·후배에 한턱내며 짧지만 긴 소통 나누는 자리

문학시장만큼 완벽하게 세계화 된 데도 없다. 영화처럼 스크린쿼터 같은 국가적인 보호막 신세를 져본 일조차 없다. 한국의 작가들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죽, 죽었거나 살아있는 전 세계적인 작가들과 경쟁해왔다.

그래도 ‘민족주의’가 대단한 호소력을 지녔던 70~80년대는 좀 나았을 것 같다. 민족은 국가대표 경기 때만 찾고 세계화에 목숨 걸고 문학보다 중독성이 훨씬 강한 인터넷이 지배하는 시대, 모두들 돈 벌고 돈 쓰느라 허둥지둥하는 시대, 이렇게 문학과는 거리가 먼 시대를 사는 작가들은 참 갑갑하다.

젊은 작가들의 처지는 더욱 처연하다. 인터넷 영화 스포츠 케이블티비 그리고 각종 취미생활에 독자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얼마 되지 않는 독자들을 두고, 세계적인 작가들뿐만 아니라, 육칠십년대부터 한국문학을 책임져온 대선배님들과도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

게다가 문학시장도 스타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스타시스템은 소수에게 몰아주기다. 스타가 될 수 없는 운명의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은 문학행위로만 먹고 살기가 불가능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문학을 밀어붙이고 싶다면, 다른 일로 생계비를 벌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바쁘다. 대학생들만 낭만도 없이 운동도 모른 체 시험공부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작가들도 낭만도 없이 참여에 인색한 체 (문학만 하지도 못하면서) 한없이 분주하다. 다들 바쁘니 만나기도 쉽지 않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술값은 둘째 치고 차비도 걱정하느라 더욱 모른 체 산다.

문학상 시상식은 단순히 상을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다. 산산이 흩어져 각개 약진하던 문학인-소설가 시인 평론가 출판인 편집자 기자 등등-들을, 그러니까 각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든 동업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다. 시상식 자체는 각다분하다. 수상자의 당선소감이 좀 인상적일 뿐. 특히 젊은 작가들은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다.

언제부터인가 시상식 후 바로 그 자리에서 가벼운 뷔페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 풍경이 되었다. 시상식장에서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상당한 나뉨이 일어나고, 뒤풀이자리에서는 한번 앉은 자리를 고수하는 이들이 많아 활기찬 교류는 어렵다.

뷔페 식사시간이야말로 문단의 모든 구성원들이-원로 대가 중견 신진 신인의 구분을 넘어-짧지만 긴 소통을 나누는 자못 의미 큰 시공간으로 작동한다.

뒤풀이 술자리는 대형 호프의 한 층을 세 내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집단적으로 소주부터 마시던 시대는 갔다) 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가 부담하여 드넓은 곳을 일괄적으로 잡아 전부 모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문학상은 각 부문 수상자가 2차를 책임진다.

각 부문 수상자가 연배가 비슷하거나 돈독한 관계이면 같은 장소를 잡기도 하지만, 대개 장소를 따로 잡는다. 소설 수상자는 리얼리호프, 시인 수상자는 모더니호프, 평론 수상자는 포스트모던호프 하는 식이다. 축하객들은 자연스럽게 나뉘어 자기가 좀더 편할 곳으로 향한다.

문학상이 수백 개가 넘지만, 대부분 10~12월에 집중되어 있다. 시상식장과 뒤풀이 장소가 집중되는 종로 광화문 인사동 일대는 각 출판사의 망년회까지 겹쳐 늦가을에서 한겨울까지 ‘시상식 뒤풀이 시즌 문단’을 구가한다.

그래서 겨울엔 작가들 사이에 “우리가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니냐, 제발 그만 보자”라는 인사가 유행하기도 한다. 봄이나 여름에 열리는 시상식장에서 “우리가 몇 년 만에 보는 거냐?”라는 인사와는 대조적이다.

아무튼 2003~2004년에 문학전문출판사들이 대거 파주출판도시로 옮긴 이후, ‘출판사가 배려하는 출판기념회 중심의 소규모지만 항상적인 술자리문단’에서, ‘시상식 중심의 대규모적인 단기적 술자리문단’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문학상을 출판사에서 주는 거니까 그게 그거겠지만 말이다.

확실히, 젊은 작가들은 ‘열심히’ 마시지 않는다.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마시겠다는 대단한 각오를 가진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적당하게, 기분 좋을 때까지만 마시겠다는 각오가 확고하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유행했던 개사곡 권주가가 있는데, 작가의 처지에 맞게 몇 단어를 고쳐서 적어보겠다. ‘문학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문학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구차한 목숨으로 문학을 못해. 문학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 면은 술도 못 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문학 속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마셔야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마셔라. 반짝이는 술잔을 움켜쥐고 마셔라 작가여. 문학을 위해 이 한 목숨 걸고 마셔라. 원샷!’

문학에 목숨을 바치다가 하루 놀러 나왔으니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고픈 젊은 작가도 더러 있을 테다. 하지만 이런 작가를 만나기는 대단히 어렵다. 자신의 외로움을 강조하려는 외출이 아니라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으려는 외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치게 마신 술은 내일의 잡일을 못하게 한다. 설령 금요일에 시상식이 있다하더라도, 잡일로 사는 작가에게 있어 주말은 소중한 창작의 시간이기 때문에 홀연히 망가지기도 저어 될 테다. 낭만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젊은 작가의 현실이 그러하니까.

요즘 시상식의 뒤풀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라면, 수상자가 상금의 십분지 1~3을 아낌없이 털어, 빈한하고 외롭지만 자존심으로 무장하고 각자의 문학을 밀어 붙이는 동료에게 선후배에게 한 턱 거하게 쏘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품앗이가 되면 좋을 텐데, 그건 복불복이니 가장 열렬한 축하는 그저 맛나게 마셔주는 것이다.



김종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