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여 명 출연진 화려한 볼거리와 고난도 안무 집대성 5년 만에 국내무대

고귀한 신분의 남자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신분의 여자.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도도한 귀족 배필이 있고, 여자에게는 그를 몰래 흠모하는 남자가 있다. 엇갈린 사랑, 운명의 장난. 비극은 시작되고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파멸로 치닫는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 바야데르(La bayadere)’의 기본 줄거리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나는 슬픈 사랑이야기는 비단 발레뿐만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흔히 볼 수 있는 텍스트다. 그렇다면 ‘라 바야데르’가 공연 때마다 화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여러 면에서 다른 작품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대작 발레’라는 점이 제일 먼저 꼽힌다. 화려한 볼거리와 고난도 안무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라 바야데르’가 5년만에 다시 발레 팬들을 찾아온다.

발레에도 블록버스터가 있다

인도 사원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화려함이 넘치는 ‘라 바야데르’는 불어로 ‘인도의 무희’라는 뜻. 언뜻 ‘인도 발레’처럼 느껴지지만 ‘라 바야데르’는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러시아 황실발레단을 위해 만든 ‘러시아 발레’다. 이 작품은 힌두사원의 아름다운 무희 ‘니키아’, 권력과 사랑에서 갈등하는 젊은 전사 ‘솔로르’, 매혹적이고 간교한 ‘감자티’ 공주의 배신과 복수, 용서와 사랑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니키아와 솔로르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에선 ‘지젤’의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매력적인 악녀 감자티의 유혹과 계략은 ‘백조의 호수’의 오딜을 쉽게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니키아가 ‘사랑’을, 솔로르가 ‘야망’을, 감자티가 ‘권력’을 상징하는 것도 단선적인 설정이다.

그래도 다소 평범해보이는 설정에도 ‘라 바야데르’가 비범한 발레인 이유는 ‘발레의 블록버스터’라는 별명 때문이다.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말은 주로 제작비 규모가 크고 막대한 흥행수입을 올리는 영화를 가리키는 단어. 하지만 다른 발레와 비교하면 ‘라 바야데르’에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 3막 5장, 공연시간 2시간 35분(인터미션 포함)에 대규모 무대 세트, 130여 명의 출연진, 400여 벌의 의상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발레에서는 가히 ‘초대형 블록버스터’라고 부를 만하다. 러시아 키로프발레단이 1877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극장에서 초연하며 대작의 위용이 공개됐다. 한국에서는 1999년 유니버설발레단 초연 당시 출연자 150명, 제작비 8억 원을 기록해 유니버설발레단의 이름을 단번에 각인시키기도 했다.

가장 큰, 가장 어려운 발레 작품

‘라 바야데르’가 기대되는 것은 단순히 많은 무용수와 의상, 제작비의 규모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 이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은 러시아 키로프발레단(마린스키 버전), 파리 오페라발레단(루돌프 누레예프 버전),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나탈리아 마카로바 버전), 볼쇼이 발레단(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 등 일부 세계적인 발레단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규모와 더불어 무용수 개개인의 역량과 군무의 수준이 높아야 함을 뜻한다.

특히 이 작품은 주역 무용수들의 춤 뿐만 아니라 발레리나 32명의 군무와 다양한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줄거리와 상관없이 볼거리로 제공되는 여흥 춤) 등 고른 기량을 갖춘 무용수들을 많이 필요로 한다. 때문에 세계적인 발레단에게도 ‘라 바야데르’는 ‘난작(難作) 중의 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무용수들은 힘들어도 관객들은 눈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앵무새춤, 물동이춤, 인도북춤을 비롯해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황금신상춤까지 다양한 형태의 춤들은 티켓 가격을 잊게 한다. 화려한 디베르티스망으로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의 다채로움을 다른 버전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백조의 호수’ ‘지젤’과 함께 ‘백색 발레’ 최고봉

인도의 화려한 색채감을 만끽할 수 있는 다양한 디베르티스망이 1막과 2막에 걸쳐 진행된다면, 3막은 발레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백색 판타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전(前)막이 니키아와 솔로르, 감자티 등 주역들의 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3막에서는 군무진의 낭만적인 군무가 어두운 극장을 초현실적으로 밝혀주기 때문이다.

특히 3막 ‘망령들의 왕국(The Kingdom of the Shades)’의 도입부는 ‘라 바야데르’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명장면이자 ‘발레 블랑(백색 발레)’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하얀 튀튀와 스카프를 두른 32명의 망령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이 장면은 ‘백조의 호수’의 호숫가 군무나 ‘지젤’에서 정령들의 군무와는 또 다른 발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가까이서 들어보면 이들의 호흡은 거칠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다. 워낙 고난도의 테크닉과 체력과 안무의 조화가 공존해야 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라 바야데르’의 정점인 ‘망령들의 왕국’이다.

무용수들 사이에서도 힘든 작품으로 악명이 자자한 ‘라 바야데르’는, 그래서 발레 팬이라면 한 번 쯤은 꼭 봐야 할 작품이다. 5년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진 ‘라 바야데르’는 이번에도 ‘블록버스터 발레’에 걸맞은 위용을 뽐내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17∼26일까지 예술의 전당.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