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파워 갤러리] (1) 선화랑1977년 인사동에 터 닦은 후 재능 있는 작가 발굴 육성 표본김창실 대표 "작품을 상품 아닌 생명처럼 여겨요"

“가장 두뇌가 뛰어난 사람을 베토벤이라고 생각했다지. 그래서 베토벤 두상의 연작을 조각한 작가 부르델 작품이에요. 그 아래는 인체 연작하는 김영원 작가의 것이고. 어때요? 멋있죠?”

보물창고에 들어온 양, 공간을 가득 채운 조각과 그림을 보면서 신기해 하는 기자에게 김창실 대표(75)는 작품을 소개했다. 1층과 2층의 기획전시실, 3층의 상설전시실을 지나 4층 끝 자락에 위치한 그곳은 김 대표의 집무실이다. 전시실 못지않은 볼거리가 풍성했다.

로댕의 제자로, 베토벤을 존경했던 천재 조각가 부르델의 베토벤 두상과 광화문에 세워질 세종대왕상을 조각하는 김영원 작가의 작품 외에도 자그마한 조각상들이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다. 2003년 신축되면서 생겨난 공간이지만 그 곳을 채운 작품은 32년간 숙성한 화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에 20~30개에 불과했던 화랑 중 하나로 1977년 인사동에 터를 닦은 선화랑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는 화랑으로 손에 꼽힌다. 처음과 다름없이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화랑의 본령을 꾸준히 지켜온 것이나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매일 아침 화랑으로 출근하는 김 대표의 성실성과 책임감은 정평이 나 있다. 당시 화랑에서 가지고 있던 골동품이나 강화 반다지 같은 것을 내다 파는 일도 흔했지만 선화랑은 초지일관 현대미술을 고집했다.

“생명처럼 여기고 사니까.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게 경영철학이지요. 사장이 있으니 직원들은 자연히 고객들한테 느슨하게 대하지 못하거든. 근데 고맙게도 직원들이 내가 가끔 자리를 비워도 성실하고 열심히 해줘요.”

미술애호가에서 컬렉터로, 이후 화랑의 주인이 된 김창실 대표이기에 작품은 그에게 상품이 아니다. 유복한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미술, 문학의 수혜를 받아온 그녀가 결혼 후 자녀들에게 그림과 음악 공부를 시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현재 두 아들은 변호사가 되어 있고 딸은 피아노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를 경영하고 있다.

“그때 유행하는 옷이나 자게 농도 안 사고 돈이 생기면 그림을 사서 걸었지. 처음엔 그림이 좋아서 캘린더에 있는 그림을 액자에 걸어놓다가 오리지널 작품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꿈이 이뤄진 거예요.”

작품이 200점 가량 모였을 때, 마침 인사동에 세를 놨던 화랑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선화랑이 자리 잡게 되었다. 화랑 경영을 북돋아 주었던 가족들의 응원은 지금까지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79년부터 92년까지 13년간 ‘선 미술’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미술 저변을 넓혔고 수익금을 젊은 작가를 위해 쓰자고 해서 84년에 제정한 것이 ‘선 미술상’이었다. 화랑에서 젊은 화가에게 주는 최초의 상은 올해로 21년을 맞았다. 동양화, 서양화, 조각 순으로 만 35세에서 45세까지의 작가를 대상으로 평론가들과 함께 선정하는 ‘선 미술상’은 그 동안 김병종, 서도호, 이두식, 김영원, 임효 등의 쟁쟁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작가 나이 서른 다섯 정도가 되면 그림을 계속 할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를 결정해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활동이 일시적일 거라 판단되면 배제합니다. 작가나 고객 모두에게 지속성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작가들은 ‘요새 뭐하고 지내나’ 하는 사람들이 없어. 다들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요.”

선 미술상을 2~3년쯤 하다 보니 이중섭 화백의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 선생이 ‘이중섭 미술상’도 함께 진행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러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김 대표는 이중섭 미술상 전반을 기획한 후에 조선일보를 추천했다. 감사의 표시로 구상 선생이 김 대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이런 과정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화여대 약학대학을 졸업해 약국을 운영했던 김 대표가 초지일관 갤러리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애호가 이상의 전문적인 공부가 있었기 때문일 거다.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를 비롯해 여러 대학원에서 경영자 과정을 수료해왔다. 일흔이 넘어서까지 그녀는 세 곳의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화랑을 시작하던 70년대 후반에는 전 세계 갤러리를 순회하기도 했다.

그 동안 단 한 번의 대관전시 없이, 310~320회 정도의 전시를 기획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전시는 선화랑의 20주년 기념전. 그 동안 선화랑과 인연을 맺은 작가 200명의 1호짜리 그림으로 전시를 열었던 것. 당시만 해도 단층 건물이었던 선화랑에 어떻게 200점의 그림이 모두 걸리는지, 또 어떻게 1호 그림만으로 전시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픈 일이 되자 아홉 시도 되기 전부터 관람객이 모이기 시작해 일주일간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작가 당 다섯 점 씩의 1호 그림은 모두 새 주인을 찾아갔고 특별 제작한 선화랑 쇼핑백을 맨 사람들이 인사동 거리를 누볐다.

1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때를 떠올리며 김 대표는 여전히 가슴 벅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2007년에 맞은 30주년은 조용히 지나갔다. 그림 값이 비상식적으로 올라 최대한 작품 매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가격이 아니면 팔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철칙이기도 하다.

“미술 애호가가 많지 않은데, 작품의 가격이 올라가다 떨어지다를 반복하면 신뢰를 줄 수가 없지요. 단기적으로 돈을 많이 벌 수는 있어도, 그에 앞서 작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애호가들에겐 어떠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기본이라고 믿어요, 난.” 긴 세월, 묵묵히 작가들을 두루 살펴온 파수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인지, 현실을 꾸짖는 쓴 소리는 편견 없이 귀를 잡아 끈다.

아트센터, 선 컨템포러리, 갤러리 선
한 지붕 세 가족


(좌로부터) 인사동에 위치한 선화랑 전경, 소격동에 위치한 선 컨템포러리, 강남에 위치한 갤러리 선

1977년 인사동 단층 건물에서 개관한 선화랑(대표: 김창실)은 현재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의 선아트센터(2003년 신축 재개관)와 소격동에 선 컨템포러리(대표: 이명진, 2005년), 그리고 강남에 갤러리 선으로 확장되었다.

32년간 선화랑은 회화, 조각, 판화, 사진, 공예 분야에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엄선해 기획 전시를 해왔다. 샤갈, 부르델, 매그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 해외 거장들을 비롯해 한국의 실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한 '선 미술상'을 제정해 1984년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외 유수 아트페어에 20회 이상 참여하면서 한국의 현대미술을 알리는데 힘을 실었고 1979년부터 1992년까지 미술 문화 저변확대를 위해 계간 미술지인 '선 미술'을 발행하기도 했다.

선 컨템포러리는 신진작가 위주로 발굴해 국내외에 알리고 있으며 미술애호가에게 한층 다가가기 위해 접근성이 높은 강남에 갤러리 선을 2008년 오픈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