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하얀거짓말' '잘했군 잘했어' '자명고'서 나타나는 '모성'과 '효성'의 변질된 동거

엄마품을 떠나지 못하는 캥거루족과 자식 주위를 평생 맴도는 헬리콥터맘의 이야기는 어느새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대치동엄마 따라잡기 열풍은 무작정 헌신적인 모성이 아닌 ‘과학적 모성’을 탄생시켰고, 각계각층에서 활약 중인 엄친아와 엄친딸들은 평범한 아들딸들의 항시적 스트레스를 촉진시켰다.

영어를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엄친딸들 때문에 부모들이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 독수공방 하는 기러기 아빠들의 구슬픈 한숨은 일시적 트렌드를 넘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모델은 무한 진화한다. 그러나 그 진화의 방향성은 오히려 부모-자식의 내면의 성장을 가로막는 쪽을 향해 있는 건 아닐까.

자식이 마흔이 넘어서야 부모의 능력(?)이 판가름나는 시대가 왔다. 게다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프터서비스는 평생 끝나지 않는다니, 현대인들은 영혼의 젖을 떼기가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셈이다.

MBC ‘하얀 거짓말’에는 저마다 자신의 모성을 극한까지 실험하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회장(김해숙)은 후처를 맞이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배다른 아들 정우를 학대하고 친아들 형우를 지나치게 사랑한다. 그녀의 모성은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기 위한 치밀한 무대장치이기도 하다.

남편에 대한 분노를 자식에게 분풀이했던 젊은 날의 신회장은 어린 아들을 끊임없이 다그쳤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 따라해! 정우를 이겨야 한다! 크게! 정우를 이겨야한다!” 아들의 자폐증상이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신회장은 아들을 세상과 철저히 단절시켜 집에서만 사육하고자 한다.

그 뒤틀린 자식사랑이 너무 처절해 아무도 그녀의 집착을 막지 못한다. 그녀에 비하면 미혼모가 될 위기에 처한 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손자를 유기한 은영 모친(김혜옥)이나, 죽은 줄만 알았다가 되찾은 친아들을 입양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은영(신은경)의 모성은 지극히 순박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MBC ‘잘했군 잘했어’에서 성공한 도예가인 엄마 정수희(정애리)는 아들의 피트니스클럽까지 덜컥 차려줄 정도로 수퍼맘이다. 연인처럼 다정하고 친구처럼 편안한 홀어머니에 대한 아들 승현(엄기준)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그러나 엄마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아들의 눈빛은 싸늘해진다.

남편과 사별 후 20년동안 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엄마가 도대체 ‘왜’ 유부남을 사랑했는지, 아들은 한 번도 묻지 않는다. 다만 엄마의 사랑을 철저히 외면하고 각종 방해공작과 1인시위 끝에 그 남자를 떼어놓는 데 성공한다. 때마침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들의 과외선생이었던 강주(채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토록 지적이고 세련되던 수희의 표정은 한순간 냉정하게 돌변한다.

(좌) 드라마 '자명고' (우) 드라마 '하얀 거짓말'

“승현이는 내가 진정시킬게. 그런 일 있으면 진작에 이야길 하지. 남자애들은 원래 한번씩 여선생 좋아하고 그러잖아. 승현이가 형제도 없고 그래서 너한테 오래 맘을 의지했나 보다. 너도 빨리 남자 만나서 연애해. 만날 혼자 일만 하니까 승현이가 자꾸 더 장난치잖아.” 달콤한 사랑고백을 받고 한껏 달떠 있던 강주는 어안이 벙벙하다.

“장난이요?” 수희는 오랫동안 가슴앓이해 온 아들의 진정한 사랑을 ‘접수’조차 해주지 않는다. 뛰는 아들 위에 나는 엄마 있다. ‘엄마, 다른 남잔 안돼. 나만 사랑해줘.’라는 아들의 응석과는 차원이 다른 대단한 모성은 아예 아들의 요구를 우아하게 묵살해버린다. 그녀의 우아함 때문에 그 잔혹함은 모성의 이름으로 은폐된다. 엄마가 아들 때문에 사랑을 버릴 수 있으니 자식도 엄마를 위해 사랑 따윈 포기해야 한다는 치밀한 교환의 논리가 작동한다.

SBS ‘자명고’에서 대무신왕과 호동왕자의 부자관계 또한 점입가경이다. 그들에게는 어미 잃은 아들에 대한 애틋함이나 믿을 곳 하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 따윈 발 디딜 틈이 없다. 왕위를 노리는 수많은 정적(政敵)들에 맞서 그들 부자는 각자 고군분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무예와 지력이 날로 향상되어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아들은 아버지가 제발 자기 이외의 왕자를 생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소년 호동은 곧 새로운 왕비를 들이려는 대무신왕(문성근)에게 부탁한다. 말이 부탁이지 눈빛은 협박에 가깝다.

“수지련을 왕비로 들이지 않겠다, 그녀에게서 동생을 보지 않겠다 약조해주십시오.” 아비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내가 언제 너에게 내 잠자리까지 간섭하라 하더냐.” 성숙을 넘어 아예 조로해버린 아들은 맞받아친다. “소자 정적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동생과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무례를 타박하기는커녕 자신의 잠자리까지 간섭하는 아들을 가르친 스승들을 치하한다. “호동이 현실 정치에 눈을 떴네. 잘 가르쳤다!” 왕이란 자식도 죽일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어린 시절부터 학습한 호동에게 부자관계는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이합집산하는 권력놀음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극뿐 아니라 사극에도 부모 자식의 관계는 영원한 갈등의 연속이다.

이 모든 부모자식관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핏줄’을 볼모로 한 파워게임이 모성이나 효성의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한, 누구도 진정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없다. ‘성공’과 ‘자본’을 향한 무한한 숭배열로 나타나는 모성과 부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세계를 향한 ‘원한’의 가면이다.

그리하여 핏줄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의붓자식을 위해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붓는 MBC ‘돌아온 일지매’의 쇠돌이(이문식), 핏줄로도 법률로도 얽히지 않은 비안이에게 무한한 러브콜을 보내는 자폐아 형우의 눈먼 사랑이 아름답다. 애니메이션 ‘곰이 되고 싶어요’의 명대사처럼, “살아있는 것은 사슬이 아니라 사랑으로 붙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타인을 향한 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타인을 나의 영토 밖으로 언제든지 놓아줄 수 있는 해방의 용기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