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프리즘/총체예술로서의 미디어아트

1-브랜든 라벨‘소음의 건축’외부에 설치된 마이크
2-브랜든 라벨‘소음의 건축’내부에 설치된 스피커
3-빛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도록 모흐이-너지가 고안한 Light Space Modulator
4-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내부
1-브랜든 라벨'소음의 건축'외부에 설치된 마이크
2-브랜든 라벨'소음의 건축'내부에 설치된 스피커
3-빛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도록 모흐이-너지가 고안한 Light Space Modulator
4-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내부

바이로이트에 있는 한 오페라 극장의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무대와 관객석 사이에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공간은 밑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서 관객들이 지휘자나 악단이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없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설계한 것으로 1875년 완공되어 아직까지도 매년 여름이면 바그너 축제가 개최된다.

바그너가 지휘자를 비롯하여 관현악단의 모습을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설계한 것은 단순히 음향효과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흔히 ‘총체예술작품’(Gesamtkunstwerk)로 집약되는 그의 예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그너가 말하는 ‘총체예술작품’이란 시각과 청각 등 모든 감각이 한데 어우러져서 사람들의 온 감각을 총체적으로 자극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공감각적인 예술작품을 의미한다.

바그너가 보기에 기존의 오페라는 분명히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이 결합된 총체예술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오페라는 음악과 시각적인 것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예술작품이 되지 못했다.

오페라가 상연될 때 지휘자와 관현악단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인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음악이 오페라의 시각 이미지에 완전히 섞이기 위해서는 음악은 시각적으로 감추어져야 한다. 이렇게 하여 바그너는 시각과 청각이 완전히 섞인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

바그너의 총체예술작품은 20세기 이후 예술의 지향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음악은 청각적인 예술이며 회화는 시각적인 예술이라는 이분법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화를 음악과 뒤섞거나 음악을 회화와 뒤섞으려는 시도는 다분히 바그너의 총체예술작품과 관련이 있다. 칸딘스키가 회화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음악을 제시한 것 역시 이러한 예술적 이념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전통적인 음악이나 회화는 그 물리적 한계 때문에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미디어를 예술작품에 활용하는 것은 바로 바그너가 꿈꿔왔던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라는 명예는 백남준이 아닌 모흐이-너지(Moholy-Nagy)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사진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작품을 만들거나 디자인하였다.

그가 꿈꾸었던 ‘총체극’(the theatre of totality)의 이념 역시 미디어를 활용하여 바그너의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빛에 매우 집착하여 빛을 분사시켜서 가변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기계들을 직접 제작하였다.

빛의 변화는 시간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곧 이미지가 단순한 정지의 상태를 넘어서 하나의 동적인 과정을 담고 음악적 운율을 지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빛의 변화라는 시각적 이미지는 그 자체가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음악적 이미지와의 조우를 의미한다. 심지어 그는 건반을 연주할 때마다 독특한 색깔의 빛을 발광하는 오르간을 제작하려 하였다.

모흐이-너지의 작업은 미디어 아트가 총체예술작품을 지향하는 하나의 범례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바그너나 그 자신이 생각했던 총체예술작품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들이 소리와 이미지를 결합하는 방식은 지극히 외삽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19세기 이후의 물리학에 따르면 소리나 색은 모두 파동이다. 소리나 색이 모두 파동이라는 점은 얼핏 생각해도 두 개의 현상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다. 가령 소리의 경우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대로 일정한 현의 길이를 5분의 4로 자르면 장 3도 높아지며, 3분의 2로 자르면 완전 5도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색의 경우에도 파장이 제일 긴 빨간색을 기준으로 5분의 4는 녹색, 3분의 2는 파란색이 된다. 이러한 일정한 비례관계에 따라서 소리와 색을 과학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착각이다. 이는 소리와 색을 처음부터 다른 이질적인 현상으로 보고 이를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경우에 그는 오페라를 복합적인 감각의 총체로 만들기 위해서 음악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이는 음악 그 자체가 결코 시각적인 것은 아니며 청각적인 예술일 뿐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관념을 재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미디어 아트가 총체예술작품을 지향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모흐이-너지나 바그너처럼 처음부터 시각 이미지와 청각현상을 분리하고 이를 다시 섞어서 공감각적인 예술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상세계에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이미 그 자체가 공감각적이고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디어 아트가 총체예술작품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개별감각들을 정량화하고 이들을 뒤섞어 놓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 개별감각을 추상화함으로서 애초에 총체적이고 공감각적인 일상의 체험들로부터 분리된 것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소리예술을 활용하여 장소특정적인(site specific) 예술작품을 시도한 브랜든 라벨(Brandon Labelle)의 ‘소음의 건축’(architecture of noise, 2004)은 미디어 아트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마이크를 집 바깥의 도로나 문틈에 설치하고 마이크에 스며든 외부의 소리들이 집안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 들리도록 한다. 이 간단한 작품은 몇 가지 암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집안 외부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소음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서 일상적인 소음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원래 문은 외부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서 소리는 내부와 외부의 소통이다. 한편 이 작품은 이 건물이 위치한 외부의 소음을 내부로 흡입함으로서 ‘장소특정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데, 이는 곧 공간을 시각적인 한 좌표가 아닌 청각적인 사운드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확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원래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얽혀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미디어 아트가 바로 이렇게 복합적인 감각이 뒤얽힌 일상을 재생산하고 재발견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박영욱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