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대부업체 광고에서 드라마까지노골적인 돈 이야기는 미래에 대한 불안 대변

몇 년 전 만해도 대부업체 광고는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즉각적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업체 광고에 출연했다가 대중에게 지탄받은 연예인들이 공개 사과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고, 대부업체 광고가 어린이채널까지 진출하자 네티즌의 항의도 빗발쳤다.

“빠르네, 빠르네, 빠르네!” ‘피자보다 빨리 배달되는 급전’을 언제든 편안하게 빌려 쓰라고 권하는 광고에 화들짝 놀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대부업체 광고는 너무나 친숙해져버렸다. 생존의 절박함, 위급상황이나 비상사태에 호소하던 대부업체 광고들은 이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제 대출을 권하는 광고들은 절박하고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일상성에 호소한다. “한두 달 빌려 쓰면 되는데, 아쉬운 소리하기 싫어요. 한 번만 전화하면, 한번만 전화하면!” 이런 광고를 보면 유흥비나 여가비용을 위해 대출을 받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다.

탈모로 고민하다 배추가발을 사서 쓰고(물론 그 가발은 ‘대출’받아 산 가발이다) “청담동 스따일이야!”라며 배추머리를 우아하게 뒤로 넘기던 ‘무과장’의 인기는 대단하다. 눈웃음이 상큼한 여직원이 1+1 행사로 받은 케?揚?무과장에게 선물하며 “과장님은 저에게 소중한 분이시니까요.”라고 속삭일 때,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빛에 홀린 시청자들은 잠시 이것이 대부업체 광고라는 것을 기꺼이 망각한다.

“난 가정이 있는데……”라며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는 무과장의 어쩔 수 없는 귀여움은 대부업체에 대한 시청자의 경계심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래,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돈은 꼭 절박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 “갑자기 생길 ‘만약’을 위해!” 언제나 돈은 필요한 거라구. 불법추심도 안한다잖아? 이미 일어난 돌발상황이 아니라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돌발상황을 위해 대출이 필요하다는 이 휘황찬란한 광고 논리에 우리는 혀를 내두른다.

그래, 인생은 셀 수 없는 ‘만약’의 지뢰로 이루어진 거대한 함정이야. 만약을 위해 대출 좀 받는 게 뭐 그리 나쁠까. 우리는 그렇게 대부업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을 망각하기 시작한 걸까.

광고뿐 아니라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점점 더 ‘화폐’에 대해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화폐에 대한 다양한 정보에 노출되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화폐에 구속되어 간다. 초등학생도 펀드와 주식에 대한 정보를 읊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역사상 가장 절박하게 “돈! 돈! 돈!”을 외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결혼상대를 고르는 최고의 기준은 직업이나 외모나 학벌이 아니라, 그 모든 차이를 잠재우는 ‘돈’이다. ‘돈이 필요하다’는 감정은 이제 현재의 일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잠재적인 문제가 되었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가입된다는 보험들은 ‘불안한 미래’를 향한 현대인의 공포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왜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은 위험에 벌벌 떨고, 닥치지도 않은 죽음을 준비하느라 미리부터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 걸까. 보험설계사는 이제 ‘라이프 플래너(life planner)’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각광 받는다. 보험회사의 광고카피처럼 ‘생애 설계의 완성’은 철저히 ‘보장자산’의 운용에 달려 있는 것일까.

대부업체 '러시 앤 캐시' 광고

KBS드라마 ‘남자 이야기’는 돈 때문에 인생 자체를 저당 잡힌 사람들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성공한 만두공장 사장이었던 형이 ‘쓰레기 만두’의 오명을 쓴 채 자살한 후, 김신(박용하)은 사채업자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는 남은 가족들과 사랑하는 여자마저 떠나보내고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한 채 감옥행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채빚을 대신 짊어진 연인이 ‘강남 텐프로’에 입성했다는 사실을 알고나자 더 이상 세상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연인(박시연)을 찾기 위해 그녀가 일하고 있는 업소에 찾아가지만 그녀의 반응은 냉담하다. 얼마면 너를 되찾을 수 있겠냐고 묻자 그녀는 말한다. “1억 있어?” “1억이면 돼?” “하룻밤에 1억. 일주일 같이 놀고 싶으면 최소한 강남권에 오피스텔 하나.” 사랑했던 사람과의 대화치곤 지나치게 살벌하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여자친구를 자신의 힘으로는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을 김신은 뼈저리게 깨닫는다. “난 이 세상이 좋아. 몇 억짜리 자가용으로 모시겠다는 놈들이 몇 억짜리 헬스 회원권 갖다 바치면서 하룻밤도 아니고 하루낮만 데이트해달라고 줄 서 있어. 난 이제 100만원짜리 이하 가방은 못 들어. 쪽팔려서. 이런 나 데려가서 어쩌겠다는 거야?”

“낭만은 짧고 생활은 길다”는 것을, 대중문화 콘텐츠는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화폐로 이루어진 중력장 바깥의 삶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매순간 확인해야 한다. 김신은 “남은 인생! 돈으로 세상을 전부 사겠어!”라고 결심해 보지만, 복수의 엔진오일로 굴러가는 그의 삶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눈빛은 불안하다.

찰리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난하다는 것은 결코 매력적인 것도 교훈적인 것도 아니다. 나의 경우에 있어 가난은, 부자나 상류계급의 우아함을 과대평가하는 것밖에 가르쳐주지 않았다.” 현대인은 가난자체보다 가난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한다. 가난에 대한 공포가 슬픈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경계가 끊임없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염없이 부러워하느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폄하하게 만든다. 우리는 잠시 화폐의 중력장 바깥에서 생각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일들의 목록을 다시 꺼내놓고 하나하나 체크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돈 ‘때문’이 아니라 돈을 ‘핑계’로 우리의 가능성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일을 회피해온 것은 아닌지. 돈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나 돈 때문에 포기한 우리의 가능성은 더 소중하다. 들뢰즈는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죽고,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정여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