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와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파란만장한 인생 미술로 극복, 현대 들어 작품·삶 재조명 활발

여성이 미술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방문객의 자격이거나 아니면 모델 일 때만 가능했다. 남성중심의 미술동네에서 여성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겹고 어려운 일인 동시에 몇 곱절 어렵고 지난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역경을 뚫고 세계 미술사에 등재된 최초의 여성화가가 있다. 카라바조(1573~1610)와 라파엘로(1483~1520), 루벤스(1577~1640), 벨라스케스(1599~1660), 렘브란트(1606~1669)등 바로크의 거장들이 어깨를 겨루던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가 바로 그 사람이다. 여성이란 인간이기 전에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던 야만의 시대에 아르테미시아는 끈기와 열정으로 여성화가로서 당당하게 미술사 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티(Orazio Gentileschi, 1563~1639)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12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살림을 하며 두 동생을 돌보는 딸이자 아내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유일한 모델로서 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10대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아버지로부터 그림물감사용법 등을 배워 당시 여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8세가 되던 해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수하에 두려고 하는 와중에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타시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이에 딸과 아내를 동일시하는 아버지는 소송을 제기하고 재판과정에서 그녀는 치욕스런 일들을 당하고 모함을 받게 된다. 이 사건은 그녀를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여성화가로서 미술사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린 아르테미시아의 삶을 영화화 한 것이 바로 동명의 영화 <아르테미시아> (Artemisia, 1997)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아그네스 메렛이 감독하고 발렌티나 세비가 아르테미시아 역을, 미셸 세로가 아버지로, 그리고 미키 마뇰로비치 등이 출연한 전기 영화이다.

하지만 소송으로 인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그것은 당시 여성들에게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소송에서 이겼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순결하지 못한 여성이라는 불명예뿐이었다. 지참금이 탐나 그녀의 과거를 눈감아주기로 한 무능하고 낭비벽 있는 화가 피에트로와 결혼, 피렌체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공포와 심리적 박해를 피했지만 무능한 남편 때문에 쉴 틈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피렌체에서 화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코시모 2세 드 메디치, 마리 드 메디치, 알카라 공작 등 명문 귀족과 왕가의 후원으로 모든 것을 잊고자 그림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28세에 여성 최초로 ‘Accademia di Arte del Disegno’의 회원이 되어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독립적인 권리와 정신적 자유를 얻게 된다.

그리고 34살이 되던 해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구하지만 대신에 예술적 성취를 포기해야할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버리는 결단을 내린다. 이렇게 그녀의 예술은 여성으로서 삶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시절이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이기보다는 화가의 길을 선택했던 아르테미시아는 고대 역사나 신화, 성경에서 소재를 구해 자신의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의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고 격정적이며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이를 이겨내려는 듯 강인한 여성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화가라는 시대적, 종교적, 정치적 멸시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작품들을 통해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좌)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 (우) '수잔나와 두 늙은이'

특히 카라바조의 강한 명암대비법과 이를 사실주의적인 시각으로 승화시킨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연극적인 화면구성과 빛과 그림자가 강하게 대비되면서 그녀의 화면은 신비롭지만 강한 힘을 드러내면서도 서정적이다.

그의 대표작 <홀로페르네스와 목을 베는 유디트>(1620년, 199X163cm, 우피치미술관, 피렌체)를 보면 그녀는 화면 속 유디트로 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성폭력의 경험을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그림에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베돌리아를 공격한 앗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혈이 낭자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녀의 상처를 읽을 수 있다. 그녀는 강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자 성경 속 여걸로 자신을 대체시키면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자신의 회한을 담아낸다.

그녀는 결연하게 자신을 망가뜨린 그를 처절하고 분명하게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하얀 시트위에 흐르는 선혈에도 불구하고 유디트, 아니 주인공 아르테미시아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이 순간을 들여다본다. 마치 확실하게 기억이라도 해 두려는 듯. 또 그녀의 <수산나와 두 늙은이>(1610년, 170X121cm, 바이센슈타인 성, 스위스)도 겁탈하려는 두 노인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순결을 지키다 모략에 빠진 수산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그녀의 작품은 강간당했던 자신의 치욕스런 경험과 그 상흔으로부터 비롯된 남성혐오, 죄악, 환상 등 전복적 힘이 바탕이 된다.

아르테미시아는 피란토니오와 사이에서 4남과 1녀를 두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모두 잃고 딸 프루덴지아만 남아 1621년 함께 로마로 돌아온다. 이렇게 그녀는 여자로서 뿐 만 아니라 어미로서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후 나폴리를 거쳐 베니스로 그리고 결국 1639년 아버지가 있는 런던으로 간다. 어렵게 찾은 런던에서 부녀간의 애증과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건 25년 동안의 경쟁이 끝나면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아버지 오라치오의 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지 않던 그녀는 늙고 병약한 몸으로 영국 그리니치 궁 천장화를 그리던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46세에 다시 아버지를 찾은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유작 <평화와 예술의 비유>를 함께 완성시키며 부녀는 화해하고 아버지는 같은 해 런던에서 눈을 감는다.

이후 레테의 화가가 되었지만 1916년 로베르트 롱기(Roberto Longhi, 1890~1970)가 그녀를 세상에 알렸고 20세기 후반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로마와 뉴욕에서 열린 <오리치오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Orazio e Artemisia Gentileschi) 전을 통해 새롭게 그 가치를 평가받게 된다.

이런 그녀의 기구한 삶은 전기소설가 알렉상드라 라피에르(Alexandra Lapierre)에 의해 소설로도 쓰였다. 1976년 LA에서 열린 <1550∼1959년의 여성 미술가>라는 전시회에서 그녀의 작품을 본 후 그 천재성에 홀려 남성중심의 미술사에서 ‘레테’처럼 잊혀 진 그녀를 오늘로 불러내 소설로 환생시켰는데(1999년) 우리나라에서는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라는 제호로 함정임 번역으로 2001년 출간된 바 있다. 또 2002년에는 수잔 브릴랜드(Susan Vreeland)에 의해 <아르테시미아의 열정>이라는 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