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특별전 통해 스리랑카 영화의 재발견
이는 2005년 비묵티 자야순다라의 ‘버려진 땅’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이후 스리랑카 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스리랑카 영화에서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중요하게 논의될 지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리랑카 영화가 만들어져 온 역사, 사회적 맥락과 관계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스리랑카 영화의 기원과 현황을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한 역사, 척박한 현실이 스리랑카 영화의 원천
때는 스리랑카의 독립기념일인 2월4일, 한 늙은 군인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 풍경은 한가한데 그의 얼굴에는 불안하고 절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군인의 시야에 종종 침입하는 폭격 장면은 그가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꺼림칙해 하며 피한다. 그나마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노숙자들뿐이다. 그중 매춘으로 생계를 꾸리던 여자와 그녀에게 손님을 끌어주는 소매치기 남자는 결국 경찰의 단속에 걸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특별전에서 상영된 달마세나 파티라자 감독의 1981년작 ‘늙은 군인’이다. 주인공은 황폐해진 스리랑카 사회의 내면을 상징한다. 스리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고, 독립한 후에는 싱할리족과 타밀족 간의 내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 바람에 정치적인 바탕이 성숙하기 어려웠고 급속하게 이루어진 근대화는 빈곤과 사회 불안 등의 문제를 낳았다. 스리랑카 영화는 이 와중에 생긴 사회의 상처를 담고, 인간과 삶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 왔다.
민족영화로서의 스리랑카 영화의 기원
현재의 스리랑카 영화의 기원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리랑카 영화가 인도 ‘발리우드’ 상업 영화의 영향 하에 있었고 따라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스리랑카 사회에 기반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시기였다.
이때 레스터 제임스 페리에스 감독은 기존의 영화적 관습을 넘어 스리랑카 민중의 삶을 포착한 영화 ‘운명의 선’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스리랑카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에 진출하며 세계에 스리랑카 영화의 존재를 알렸을 뿐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민족 영화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간간히 이어져 오던 스리랑카 영화의 계보는 1960년대 후반 달마세나 파티라자 감독의 등장으로 그 골격을 갖추게 된다. 그의 첫 장편영화 ‘머나먼 하늘’은 당시 스리랑카 사회 젊은이들의 곤경에 주목한다.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는 그들을 통해 급격한 근대화가 낳은 부작용, 즉 역사적 단절과 사회적 불안 등의 문제를 직시한다.
많은 평자들이 달마세나 파티라자의 영화들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비슷한 철학을 읽어낸다. 네오리얼리즘은 전후 이탈리아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시도된 사조였다.
달마세나 파티라자 감독은 근작인 ‘꿈속의 미래’(2001)까지 이런 고민을 이어오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스리랑카 젊은이들은 여전히 실업 상태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암울한 현실의 탈출구로 이탈리아로의 이민을 꿈꾼다. 하지만 이탈리아로 보내주겠다는 꼬임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지난 4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감독은 “스리랑카 내에서, 특히 취약계층에게는 더더욱 고용 기회가 없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에서 20마일 떨어진 니감부라는 도시는 ‘리틀 이탈리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이곳의 젊은이들이 이탈리아에 가서 일을 하고 가족에게 생활비를 부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세계화의 물결에 흡수된 스리랑카의 사회적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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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리얼리즘 미학으로 확장
이런 스리랑카 영화 특유의 리얼리즘은 프라사나 비타나게, 아소카 한다가마 등의 ‘3세대’ 감독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프라사나 비타나게의 최근작인 ‘팔월의 태양’(2003)은 내전으로 인한 삶의 고통에 주목한다. 배경은 스리랑카 정부와 반군 ‘타밀 독립 호랑이 부대’ 간 평화 협정이 결렬된 1996년이다. 11살 소년과 그의 가족들은 반군에 의해 마을에서 추방당하고, 한 여자는 전선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 나선다.
한 젊은 군인은 성매매업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자신의 여동생을 발견한다. 드라마틱한 이들의 사연은 그러나, 감정적이거나 선정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스리랑카의 자연 속에서, 적절한 속도와 거리감을 유지한 채 보여진다. 그리하여 이 비극의 맥락과 사람들의 대처 방식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아소카 한다가마는 2000년작 ‘이것은 나의 달’에서 전쟁이라는 혹독한 상황에서 더욱 치열해지는 실존의 욕망과 노골화되는 생의 부조리함을 탐구하는 데까지 나간다. 스리랑카 정부군과 반군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한 참호에 타밀 여자 한 명이 들어온다.
홀로 참호를 지키던 군인은 그녀를 겁탈하고, 문득 전쟁에 신물을 느껴 탈영한다. 고향 마을로 향하는 그의 뒤를 여자가 따른다. 그리고 보수적인 고향 마을은 이 둘의 등장으로 술렁인다. 남자들은 낯선 여자에 대한 욕정을 숨기지 못하고 군인의 약혼녀는 질투로 불타오른다.
스리랑카 영화의 미학은 이처럼, 자국의 상황을 정확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데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결국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것은 ‘고전’의 미학과도 닮았다.
이 영화들이 자꾸 개개인의 삶과, 그것을 틀 지우는 구조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우치기 때문에, 스리랑카 정부는 종종 상영을 방해한다. 아소카 한다가마 감독의 최근작은 상영금지 당했다. 달마세나 파티라자 감독의 ‘꿈 속의 미래’는 개봉 당시 정권의 이해에 따라 삭제 명령을 받았는데 이에 불복해 조기 종영했다.
달마세나 파티라자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프라사나 비나타게 감독
-당신을 비롯한 3세대 감독들은 달마세나 파티라자 감독으로 대표되는 1세대의 미학을 계승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영향 받았나. |
아소카 한다가마 감독
-스리랑카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궁금하다. 제작비를 조달하기가 어렵다고 들었다. |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