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과 그의 아내 리 크레이즈너미국의 대표적 여성화가, 폴락과 크레이즈너 재단 만들어 젊은 작가 지원

(좌) 리 크레이즈너의 무제 (우) 1330억에 팔린 폴락의 작품 '넘버 5' 1948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 또는 힘이 세다고 스스로 믿는 미국이지만 항상 미국은 문화적인 콤플렉스에 시달려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피난해 온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미국 문화계는 점령당한 형국이었다.

문화후진국으로서의 미국에게 그 콤플렉스를 벗게 해 준 화가가 있었으니 그이는 다름 아닌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이다.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미국원주민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뉴욕 스튜던트 리그에서 토마스 벤튼(1889~1975)을 사사했고 1930년경부터 표현주의적 화풍을 버리고 추상화가로 전향했다. 그 후 페기 구겐하임(1898~1979)과 모더니즘 미술의 옹호자 그린버그(1909~1994)의 후원아래 격렬한 필치의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시도했으며 1947년부터 바닥에 화폭을 깔고 그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을 통해 미국적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

그 후 미국미술의 부동의 선봉에 섰고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창조적 고민과 세상과 교감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술에 취해 차를 몰고 과속으로 질주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런 천재적인 폴락의 뒤에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추상표현주의의 또 다른 주요한 작가이자 폴락의 반려로 그의 천재성에 불을 지폈던 여성화가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 1908~1984) 가 있다.

폴락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폴락’(Pollock,2000)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 리 크레이스너는 마치 고흐가 세상에 존재하기위해 그의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0)가 있었던 것처럼 폴락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후원자인 동시에 반려이며 동시에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마샤 가이 하든이 분한 리 크레이즈너는 1908년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 2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1926년 쿠퍼 유니온의 여자미술대학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해서 2년 후 미술대학생 연맹, 그 다음엔 국립디자인미술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사범대학 과정에 들어갔다.

공황이 닥치자 미국공공사업촉진국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으며 미술공부를 다시 해 1940년까지 독일에서 이민 온 화가 한스 호프만(1880~1966)을 사사했으며 미국 추상화가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2년에는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과 함께 뉴욕 맥밀란 화랑에서 열린 ‘프랑스와 미국미술’전에 참여하면서 4살 연하의 잭슨 폴락을 알게 되어 곧 동거에 들어갔고 그후 리 크라이스너는 폴락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리 크라이스너가 폴락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그림을 접고 폴락을 통해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대신 성취하려는 영화의 도입부가 그것이다. 무명의 화가 폴락은 피카소의 전시회를 다녀온 후 술에 취한 몸을 이끌고 집 계단을 오르며 소리친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 자식이 다 해먹었어.”그 후에도 몇 차례 더 피카소에 대한 열등감을 내뱉는 데 그것은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탓 때문이었다.

형님 집에 얹혀살던 그가 고민과 방황을 거듭하던 시기, 함께 전시를 열기로 한 여성화가 리 크레이즈너를 만나면서 자신의 길을 정하게 된다. 폴락을 만난 그녀는 묻는다. “스승이 있었어요?”, “아니요.”, “과거에는?”, “톰 벤튼.”, “벤튼? 설마. 전혀 다른 스타일인데.” 여기에 폴락은 답한다. “칼 영과 존 그레햄 한 테 벤튼 스타일을 극복했죠.” 이렇게 그는 스승의 영향권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후 폴락과 리 크라이스너는 1945년 결혼식을 올렸고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있는 더 스프링으로 이사해서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 후 폴락은 안정을 찾으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입하게 되고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 와중에도 리 크리이스너는 마음의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폴락의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은 기쁨보다는 괴로움 때문에 내는 신음소리와 같았다.

(사진 우) 실제 크레이즈너와 폴락

그는 그림에 미친 사람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항상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에는 맨해튼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연 개인전은 부와 명예를 주었다. 그러나 스타가 된 폴락을 세상은 그냥두지 않았다.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고 때론 거들먹거리기도 해야 했다. 거기다가 폴락과 자신의 작업을 위해 아이 갖기를 거부했던 리 크라이스너의 행동은 심약했던 그를 더욱 더 자학하게 했다.

그는 유명해진 후 가식적인 자신이 싫어졌고 그래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내와 그림을 위해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면서 그는 이내 무너져내린다. 그래서 여기서 벗어나고자 수많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후원자였던 페기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작가로서 그리고 그의 명성을 위해서 리 크라이스너는 조용히, 묵묵하게 모든 것으로 가슴 속에 묻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 그를 위해 유럽행을 권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녀 혼자 쓸쓸하게 유럽으로 떠나고 그는 1956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폴락을 통해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스스로 이루기로 작정하고 작업에 몰두한다. 폴락의 아내와 여성으로서 대해주기 보다는 화가로서 대해주기를 원했던 그녀는 성별을 알 수 없도록 자신의 작품에 “L.K.”라고 서명하는 등 자신의 작업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물론 폴락과 크라이스너의 작업에는 많은 공통점과 유사성이 눈에 띄지만 이것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함께 작업했던 당시의 그림을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폴락의 죽음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크라이스너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폴락이 어려웠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1985년 ‘폴락과 크라이스너 재단’(Pollock-Krasner Foundation)을 세워 젊은 작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을 발전시켜 1946~51년 사이의 ‘작은 이미지’(Little Image) 시리즈와 1957~59년 연간의 ‘초록시리즈’(Earth Green) 그리고 이후 ‘밤의 여로’(Night Journey)시리즈를 통해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화가로 자리를 확고히 한다.

그녀는 뉴욕에서 1984년 6월19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폴락의 옆에 묻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6개월 후 MoMA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그녀가 죽은 지 사반세기반인 작년에 다시 회고전이 열렸는데 이는 MoMA 80년 역사상 여성작가 회고전으로는 4번째 것으로 이것만으로도 리 크라이스너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