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시티홀''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현실 정치 대안으로 '작은 정치' 가능성 보여줘

이제 정치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보다도 인기가 없다. 10년 전만 해도 술자리만 펼쳐지면 정치에 대한 고담준론을 펼치던 정치 마니아들도 이젠 차라리 연예인의 가십으로 술자리의 공허를 채운다. 20대의 탈정치화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20대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뿐이고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을 한 번도 즐겁게 해준 적이 없는 정치를, 그들에게 매년 약속하는 일자리 한 번 제대로 창출해 주지 못하는 정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제 정치 자체에는 무관심해졌지만 정치에 대한 패러디에는 흥미를 느낀다. 현실 정치를 향해 논리적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정공법은 네티즌의 눈길을 끌기 어려운 시대.

사람들은 차라리 네티즌의 유쾌한 농담과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를 통해 ‘진짜’ 정치를 가상으로 단죄한다. 진짜정치처럼 보이는 뉴스형 정보는 대부분 쇼맨십이라는 것을 중학생도 아는 시대다. 사람들은 이제 거꾸로 뉴스를 ‘개그콘서트’처럼 즐기고, ‘개그콘서트’를 뉴스처럼 보는 비법을 터득했다. 진지하게 정치를 비판하면 도청 당할지도 모르니 엔터테인먼트의 가면 뒤로 숨어야 한다.

어느 때보다도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해졌을까. 인터넷은 과연 전자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일까. 아니, 사람들은 인터넷을 직접민주주의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기는 한 걸까. 아이디는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지만 오히려 개인의 정체성을 위장하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쓰인다. 아이디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드러내는 척하면서 오히려 숨기곤 한다.

우리는 점점 얼굴 없는 대면에 익숙해진다. 매일매일 갖은 교태와 술수를 부려가며 ‘고객님’을 유혹하는 스팸 메시지의 무차별 공격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상공간에 빼앗긴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우리는 점점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 없는 낯선 사람이 우리의 삶에 침투하여 일상을 교란시키는 일에 익숙해져 간다.

‘국가’나 ‘정부’로 대변되는 초대형 권력은 보다 영리해진 검열의 촉수로 개개인의 삶을 감시하곤 한다. 개인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인터넷에 입력한 검색어만으로도, 언제든 공권력은 IP추적을 통해 ‘마음에 들지 않는 개인’을 색출해낼 수 있다. 인터넷은 네티즌에게 정치적 참여의 직접적 경험보다는 참여하고 있다는 가상의 쾌감을 선사한다.

SBS드라마 ‘시티홀’은 오직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버린 현실 정치의 대안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유쾌한 드라마다. 그 대안은 혹시 ‘작은 정치, 얼굴을 맞댄 직접성의 정치’가 아닐까. 여주인공 신미래(김선아)는 정치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소박한 노처녀이지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알고보면 철저히 정치적인 파워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정치적 힘은 너무도 하찮은 공간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공감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그녀는 10급 공무원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며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하면서도 조직의 수장조차 해내지 못한 수많은 기적을 창출해낸다. 그녀는 여자 홍반장처럼 어디서든 불쑥불쑥 출현하여 힘겨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차마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준다. 그녀는 한 번도 전문적인 정치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정치에 필요한 각종 기본기는 물론 적재적소에 필요한 필살기를 구비하고 있다.

그녀의 삶은 가장 비정치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가장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로 가득하다. “모든 정치는 다수의 무관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격언과 달리, 신미래는 타인을 향한 무한한 관심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앞가림도 하지 못할 정도다. 밴댕이 아가씨 선발대회에 나간 그녀는 가난한 이웃집 할머니댁 도배를 해주느라 숙소를 무단이탈하여 자격을 박탈당할 정도다.

“선거란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라는 격언과 달리, 그녀의 정치는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끝내 끌어안기 위한 정치다. 그녀는 윗사람들의 권모술수에 매번 희생되지만, 밴댕이아가씨선발대회의 비리를 밝히려다가 멀쩡한 일자리까지 잃었지만, 아버지에게 무자비하게 버려진 막내딸이 끝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바리데기처럼, 끝내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끌어안으려 한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뉴타운 공약 실현 가능성에 따라 정치인을 택하는 한국사회의 황폐함이,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오직 ‘경제’만을 바라보고 정치인을 선택하는 우리의 맹목이, 부끄럽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단지 선거에 투표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순간의 사소한 선택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행했던 모든 기권은 단지 중립이 아니라 암묵적 동조였음을, 계란 던지기라는 가학행위를 당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그녀를 통해 슬프게 재확인한다. 그녀의 일상 속 정치는 “주실 거면 더 큰 걸 주십시오. 전 이 나라가 갖고 싶습니다.”라는 조국(차승원)의 ‘커다란 정치’보다 훨씬 ‘작은 정치’지만, 그녀의 정치는 작으면 작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신비를 뽐낸다.

신미래는 불특정 다수를 지배하는 거대한 조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안부와 걱정거리를 빠지지 않고 챙기는 ‘작아서 더욱 아름다운 정치’를 꿈꾼다. 찻잔 속의 태풍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무엇이 되는지 알고 싶었다는 이정도. 그는 이제 더 이상 공권력에도 미디어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맨몸 하나로 자신의 싸움을 시작한 미래에게 말한다. “미래씨 태풍은 찻잔을 깨고 나왔네요.”

우리의 한숨도 우리의 눈물도 인터넷의 그물을 찢고 TV의 액정을 깨뜨려서라도 세상 속으로 뛰쳐나가기를.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않아야 맛’이라고 믿는 우리의 허무주의를 향해 신미래는 말할 것이다.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는 세계 지도는 일견할 가치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늘 상륙할 한 나라를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오스카 와일드)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저마다의 신미래가, 저마다의 홍반장들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