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읽기] 7일간의 국민장 후에도 '다시보기' 하는 노란 풍선의 꿈

2009년 5월 23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안방극장에서 시작되었다. 그 영화는 장장 7일, 그러니까 러닝타임이 7x24=168시간인 초유의 장편영화였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그가 경호관도 없이 홀로 바위산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나리오였다.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비로소 시작된, 그가 세상을 떠나고나서야 비로소 그를 이해하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그리하여 이제는 망자가 된 주인공을 사랑해야 할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광대한 다큐멘터리.

그의 유서는 어떤 구체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가 겪어야했을 모든 고통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원망하지도 슬퍼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한 그 편지를 끌어안고 이제야 원망하고 슬퍼하고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숨고 싶지만 숨을 수도 없다. TV를 꺼도, 인터넷창을 닫아도, 그가 그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홀로 겪어야만 했을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마지막이, 마치 유체이탈을 하여 현장을 목격한 듯 생생하게 눈앞에서 재생된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눈망울에 그의 잔영이 배어 있다.

7일간의 국민장은 곧 7일간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영화였다. 그로 인해 아무리 실제라고 강변해도 올드무비처럼 아스라하게 멀어보이던 세상이, 뉴스에 둔감하다 못해 불감증에 빠져버린 나의 생살을 뚫고 들어왔다. 이건 영화가 아니야, 이건 삶이야, 눈을 부릅뜨고 견뎌야 해.

그러나 TV를 시청하고 분석하는 것이 주요업무인 나는, 그 일로 밥을 벌어먹는 나는, 더 이상 TV화면을 마주할 수 없어 전원을 꺼버렸다. 세상을 향한 창문이었던 TV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를 노려보는 잔혹한 눈동자가 되어버렸다.

잠시라도 이 잔인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홍대앞을 걸었다. 젊음과 유희의 공간 홍대에서 그의 흔적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며. 과연 아무 흔적도 없었다. 그곳은 어제처럼 유쾌한 젊음들로 바글거렸다. 그러나 아무 것도 사고 싶지 않고 어떤 광경도 나를 매혹시키지 못했다.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이 아니라 우리의 망막 자체가 스크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망울에 이미 그의 잔상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어딜 가도 온통 그 사람, 그 사람뿐이었다. 떠나버린 그는 우리의 망막 위에 영원히 정지된 스틸 화면으로 고여 있었다.

이 영화 아닌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그 어떤 거대한 스크린으로도 담을 수 없는 광대한 노란 눈물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러나 그 스펙터클은 현실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차벽’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내가 한 번도 참여해보지 못한 정치가, 내가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못한 한 인간이 내 삶으로 파고들어왔다.

현실과 주체를 매개하는 수단으로서의 ‘미디어’가 사라지고 섬뜩하도록 잔혹한 ‘메시지’만이 또렷이 보였다. 북핵이라는 메가톤급 폭탄도 우리의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미공개사진이 공개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연출될 수 없는 그의 진짜 얼굴이 우리의 마음을 할퀴었다.

손녀와 과자 뺏어먹기 놀이를 하는 대통령, 소파에서 널브러져 쉬는 대통령, 마을주민과 러브샷을 하는 대통령,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엄마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대통령……. 그것은 어떤 교묘한 연출로도 속일 수 없는 한 인간의 벌거벗은 아름다움이었다. 미공개 영상은 영화의 NG모음처럼, 감독판 DVD패키지에 실린 부록처럼 우리를 은밀하게 기쁘게 해주었다.

잠시나마 그가 살아돌아온 듯한 구슬픈 착각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픔으로 이어진 노란색 매듭이 끝없이 뻗어 온 세상을 뒤덮어버릴 것 같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7일이 지나자마자 TV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다. ‘이제 그 대단한 영화는 끝났으니 그만 일상으로 복귀하시지요,’라고 냉정하게 뇌까리는 듯 했다. 나는 아직도 인터넷이 불편하다. 그러나 이번만은 인터넷을 사랑하기로 했다.

TV에서는 벌써 끝나버린 이 영화를, 인터넷을 통해서는, 내가 울고 싶을 때마다, 내가 잊지 않으려 안간힘 쓸 때마다, ‘다시보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정말 이상한 영화. 같은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도 매번 또 다른 슬픔으로 차오르는 눈물. 그곳에는 분노와 슬픔을 희망으로 갈무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7일간의 영화가 끝난 후 모든 예능프로그램이 낯설어졌다. 나의 중요한 글쓰기 소재였던, 생계에 혁혁한 도움이 되었던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 모두가 한없이 낯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일주일이라는 러닝타임은 너무 짧았다. 역사상 가장 긴 영화였지만, 그 일주일조차 그를 잃은 슬픔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래 전에 실현된 줄로만 믿었던 민주주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머나먼 유토피아였음을, MB정부는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너무 일찍 와서 이해받을 수 없었고, 너무 늦게 와서 환영받을 수 없었던 사람. 이제 그를 보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 슬픔에 빠져 7일이 아니라 7년이라도 허우적대고 싶다. 매일매일 정체를 바꾸는 이 신비로운 슬픔에는 기묘한 중독성이 있다. 나는 차라리 쉬지 않고 슬퍼함으로써 ‘살아남기 위하여’라는 핑계로 더러워진 내 삶을 결벽증 환자처럼 히스테리컬하게 씻어내고 싶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는 그를 잃은 슬픔에 중독되어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망각했다. 그의 죽음보다 아름다운 것은 그의 삶이었음을. 그 비극적인 죽음마저 곧 그의 치열한 삶이었음을. 이제 이 7일간의 영화의 정체를 밝힐 때가 되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 상영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망막 위에서 계속 재생된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영화가 저마다의 아프고 고단한 삶 속에서 희망차게, 장엄하게 시작될 것이다. 눈을 감아도 상영되고 잠을 잘 때도 꿈속에서 계속되는 이상한 영화. 눈을 뜰 땐 우리의 망막에 고여 있고 눈을 감으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드는 영상. 그는 죽음으로써 저 세상으로 저물어 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너무도 짧은 이 공식적인 이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비공식적인 만남의 신호탄일 뿐이다. 우리가 약해질 때마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망각할 위험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그가 사랑했던 인터넷에서 변함없이 상영되는 그의 영화를 ‘다시보기’할 것이다. 다시 울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살아낼 것이다. 노란 풍선의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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