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와 책의 합성어… 저자/독자-출판사-독자로 제작과 유통순서 바꿔

주부 김향숙(41ㆍ여) 씨는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를 삶의 통찰과 연결짓는 에세이를 써왔다. 글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도 정리되는 치유의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쓴 글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방법을 잘 알 수 없었다. 기성작가도 아닌 일반인이 출판사 문을 두드리는 용기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글쓰기 클럽을 발견한 것이다. 그도 고부간의 갈등을 비롯한 자신의 가족에 대한 고백적인 글을 나누기가 처음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글쓰기 정보를 공유하고 비평하며 내공을 길렀다.

이들은 결국 공동저작의 책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수익금도 ‘어린이 재단’의 결식 아동 돕기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공유’하기로 했다. 이들은 출판사에 찾아가 자신의 글을 부탁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기획하고 쓴 글을 모아 출판사를 선택했다.

지난달 4일 ‘지식노마드’에서 나온 ‘사랑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가 그 결정체. 이 책은 김 씨를 비롯해 온라인에서 만난 글쓰기 블로그 회원 10명이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김 씨는 “책 출간이라는 꿈을 이뤄서 너무 기쁘다”며 “저술부터 출간까지 클럽 회원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 힘들기도 했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됐다”고 말했다.

블로그의 내용을 책으로 만든 ‘블룩(blook)’이 출판 권력의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출판의 중심이 제작자에서 소비자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작가와 일반인으로 나뉘는 출판 주체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블룩이란 ‘책(book)’과 ‘블로그(blog)’의 합성어로 블로그에 올라왔던 글을 묶어 낸 책을 일컫는 신조어다.

출판 순서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출판사가 작가의 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네티즌이 블로그의 글을 먼저 선택한다. 경우에 따라 블로거가 출판사를 직접 선택해 출판하는 경우도 있다.

‘출판사-저자-독자’에서 ‘저자/독자-출판사-독자’의 구조로 제작과 유통의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다. 자연히 출판 권력의 방향 역시 변화한다. 출판의 무게 중심이 출판사에서 저자, 독자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중태 IT문화원 원장은 “옛날 같으면 책을 한 권 내려면 출판사의 간택을 받으려 노력해야 했지만 블룩의 출현으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이 같은 변화는 창작의 주체로서 전업작가의 권위마저 위태롭게 할 정도”라고 말했다.

블룩, 출판의 중심을 출판사에서 일반인으로

출판사가 저자를 고르고 선택하며 중심에 서는 출판 관행이 블룩을 통해 변화하고 있다. 전문적 작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모여 글과 글 쓰기 방법을 공유하며 공동저작으로 책을 내는 일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월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SNS)에서 만난 29명의 블로거들이 다양한 온라인 툴을 활용해 직접 만들어 낸 ‘2009년 블로그로 살아남다’가 대표적인 예.

이들은 출판사의 도움 없이 기획부터 집필, 디자인, 인쇄, 유통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저자의 직업은 기업가, 마술사, 프로그래머, 응원단장, 마케터, 디자이너, 컨설턴트 등 다양하다.

제작부터 출판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한 달. 블로거 클럽의 한 회원이 블로그에 대한 글을 함께 쓰자는 글을 올린 뒤 많은 댓글과 토론글이 올라왔다. 50명의 회원이 주제별로 글을 써서 원고에 응모했다. 2번의 준비모임과 작업 끝에 책이 나왔다.

제작 과정의 중심 역시 출판사가 아닌 블로거였다. 출판할 글은 각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뒤 트랙백을 걸어 서로 연결했다. 디자이너가 MS오피스 퍼블리셔로 만든 표준 편집기로 각자가 글을 편집했다. 퍼블리셔 프로그램 사용법은 웹 카메라와 동영상 강의를 사용했다. 책의 표지나 표지시안은 구글 앱스(Apps)의 양식생성 기능을 썼다.

(사진 아래) ‘2009년 블로그로 살아남기’전 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한 블로거들이 모인 출판기념회
(사진 아래) '2009년 블로그로 살아남기'전 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한 블로거들이 모인 출판기념회

생활ㆍ문화ㆍ시사, 담론의 주체 바꾸는 ‘블룩’

블룩의 출현은 출판권력과 저자의 변화를 통해 생활ㆍ문화ㆍ시사 담론의 주체를 전문가에서 일반인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일반인이 예술관련 비평이나 담론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김홍기의 블로그, 문화의 제국(blog.daum.net/film-art)에 연재됐던 ‘하하 미술관(2009)’, ‘샤넬 미술관에 가다(2008)’ 등은 책으로 나와 더 인기를 끌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는 미술을 통해 보는 패션의 숨은 이야기다. ‘하하 미술관’은 미술 심리 치유 에세이다.

이철우의 심리학 책인 '인관관계가 행복해지는 나를 위한 심리학(2007)' 역시 블로그 연재를 먼저 한 블룩이다.

블룩의 유행은 정치비평 등을 통한 시사담론을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를 교수, 언론인 등 일부계층에서 일반인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하루 70여만 명이 방문하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din.co.kr/mramor)’의 주인 이현우(42) 씨는 문화 에세이 ‘로자의 인문학 서재(2009)’를 펴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다.

블로거 ‘MP4/13’과 김용민 시사평론가가 공동 집필한 책인 ‘블로거, 명박을 쏘다(2008)’도 화제를 일으켰다. ‘MP4/13’는 ‘고소영’ 라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유명 블로거다. 그는 지난 2007년 2월 자신의 블로그에 ‘이명박 정부 고소영 라인이 뜬다’는 제목의 글을 써 하루 22만여 명의 방문자가 그의 블로그를 찾기도 했다.

의사인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2008)' 역시 블로그 글의 모음이다.

특히 요리 관련 블로그 글의 출간은 블룩의 활성화를 견인했다. 김용환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요리법을 책으로 옮긴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는 지난 2003년 출간해 현재까지 70만여 부가 팔렸다. 이 책은 간단한 조리방법과 완성 사진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요리책과 달리 사진으로 조리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요리책인 ‘혜나네 집에 100만 명이 다녀간 까닭은(2006)’도 인기를 끌었다.

여행ㆍ생활 부문에서도 블룩은 베스트 셀러의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해왔다. 오영욱의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2008),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2006),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2005)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박성빈의 여행책 ‘그리우면 떠나라-Nova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별스크랩(2006)’도 있다.

‘황혜경의 ‘반나절이면 집이 확 바뀌는 레테의 5만원 인테리어(2006)’, 송민경의 ‘명품 다이어트 & 셀프 휘트니스(2005)' 등도 온라인에서 인기를 끈 글이 오프라인 책으로 나와 히트한 블룩 성공사례다.

전문 작가들도 변화에 발맞추기 시작, 외국에서는 이미 대세

전업작가들도 일부지만 이런 변화에 발맞춰 블룩의 대열에 동참을 시도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먼저 올리고 책 출간을 나중에 하는 식으로 변화에 발맞추고 있는 것이다. 출판권력의 변화는 일부 출판사의 전횡에 시달리던 문단이 더 바라던 바일 수도 있다.

정도상 소설가는 신작 장편소설 ‘낙타’를 8일부터 문학동네 인터넷 커뮤니티(http://cafe.naver.com/mhdn)에 일일 연재하기 시작했다. 황석영은 ‘개밥바라기 별(2008)’을 블로그에 출간보다 먼저 연재한 바 있다. 박범신도 블로그에 ‘촐라체(2008)’를 연재했다.

아마존 (www.amazon.com)에서는 블룩이 베스트셀러가 되는게 더 이상 이변이 아니다. 블로거가 책 창작과 유통의 중심이 돼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블룩은 2005년 미국 출판계 베스트 셀러의 2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MS 프로그램 관리자 출신의 미국인 조엘 스폴스키는 경영에 관한 자신의 블로그(www.joelonsoftware.com) 글을 묶어 ‘조엘 온 소프트웨어(2005)’를 펴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독일인 필립 렌센은 자신의 블로그인 ‘구글 블로코프(blog.outer-court.com)’에 올린 글을 모아 ‘구글을 재밌게 사용하는 55가지 방법(2006)’을 내놓기도 했다. ‘블룩’이라는 출판의 방법이 구글을 즐겨 쓰는 평범한 사람을 화제작의 저자로 바꿔놓은 것이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도 언제든 출판계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는 세상이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