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와 프란시스 베이컨정신보다 신경 자극하는 '촉각적인 회화' , 엽기적 묘사로 인간의 심연 드러내

미술가들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면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철저하게 전기적인 성격을 띠는 영화이다. 예를 들면 고흐의 아를에서의 삶을 그린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나 미켈란젤로의 삶을 그린 ‘고뇌와 절정’(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같은 영화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두 번째는 ‘빈센트와 테오’(Vincent and Theo, 1990) 또는 ‘카라밧지오’(Caravaggio,1986) 등의 영화같이 화가들의 작업을 위한 지적방황과 자신의 미학적 실천을 위한 몸부림을 다룬 영화가 그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909~1992)의 삶과 예술을 그린 영화 ‘사랑은 악마’(Love is Devil,1998)는 후자에 속한다.

영화는 그의 아틀리에에 도둑이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집주인은 그 도둑을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이는 범상치 않은 출발을 보인다. 존 메이버리(John Maybury, 1958~ )가 감독 겸 작가로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베이컨 역에 데릭 자코비(Derek Jacobi,1938~ ), 그의 동성연인이자 모델인 조지 다이어에는 요즘 6대 제임스 본드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다니엘 그래그(Daniel Craig,1968~)가, 그리고 그의 친구로 화가인 무리엘 베흘러 역에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1960~ )이 깜짝 출연한다.

이 영화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지만 특히 동성연인 겸 모델로 7년간 격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다 1971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지 다이어간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의 죽음을 통해 고민하고 죄스러운 베이컨의 심리적 변화가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화가로 예술가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속물적이고 사교성 있는 베이컨은 이 영화에서 성적인 면에서는 마조히스트로, 언어적인 면에서는 사디스트로 등장한다.

남자답지만 조용하고 내성적인 조지의 에로틱하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발산하는 다이어의 연기는 내면의 바닥까지 보여주는 심리적인 연기를 통해 그래그는 52회 에든버러국제영화제에서 베이컨을 연기한 데릭 자코비와 함께 연기대상을 수상한바 있다.

영화에서 베이컨과의 일상적이지 못한 관계 때문에 우울증과 정신 착란 그리고 마약에 의지하며 스스로 점점 무너져 가는 조지에 대한 이야기는 풍문으로만 전해지면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조지가 죽고 나서 베이컨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한다. 베이컨의 그림처럼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영화 속에 줄곧 흐르는데 특히 그 분위기를 더해주는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坂本龍一, 1952~ , 1988년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의 음악도 매우 훌륭하다.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생한 영화의 주인공 베이컨은 원래 중산층 집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천식과 동물 알레르기로 고생했다고 한다. 선천적인 동성애자로 자기 누이 옷을 훔쳐 입었다가 격노한 아버지에 의해 16세에 집에서 내처졌다.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독립한(?) 베이컨은 런던, 베를린을 전전하며 실내 장식일을 돕다가 노름에 미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몇 차례 전시에 참여하다 30여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화가로 활동을 개시한 그는 세상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부터 재평가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작가로 특히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 10명, 그리고 그 중 최고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채 인생의 바닥부터 전전하면서 체험한 그의 삶의 역정과 성정체성의 이상은 잔혹하고 엽기적인 화면을 통해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는 엄청나게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기도 하다. 그가 이런 주제를 선택하게 된 것은 파리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때 우연하게 구입한 온갖 질병에 관한 그림들이 담긴 책을 산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로 늘 같은 주제, 잔인함과 폭력성으로 일관되는 단순함을 유지해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자화상 연구'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하게 보는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보다는 신경을 자극하는 ‘촉각적인 회화’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난자당한 인체의 재현이 아니라 충격적인 형태와 색채를 통한 시각적 체험이 아니라 우리를 소름끼치게 하는 또 다른 감각적 체험으로 몰아가는 도구일 뿐이다. 즉 베이컨은 기괴한 신체를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충격적인 심리상태로 그림을 보는 사람을 이끌어 들이기 위한 형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우리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하는 셈이다. 즉 베이컨에서 느껴지는 폭력이라는 느낌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폭력이 되어 다가온다.

베이컨은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지 않고 없앴고 어떤 작품은 죽도록 매달렸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더블린(Dublin)의 마구간을 개조한 스튜디오-현재 더블린 시립미술관에서 관리하며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에서 1961년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치우지 않고,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은 채 자폐증 환자처럼 그림에 몰두했다.

그는 쌓이는 먼지를 방치해 먼지와 물감이 뒤섞여 그림에 쌓이는 ‘특수 효과’를 얻기도 하고 수염을 길러 그것을 붓 대신 사용하기도 하는 괴벽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와의 인연은 매우 깊다. 그의 초기 작업들은 아이젠슈타인( Sergei M. Eisenstein, 1898~1948)감독의 ‘전함 포템킨’(Bronenosets Potemkin, 1925)의 비명을 지르며 우는 간호원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 오데사의 계단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영화와의 인연 때문인지 작품이 주는 시각적 효과를 넘어 심리적 촉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1989년 제작된 ‘배트맨 Batman’에서 조커가 광대 분장으로 미술관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며 부하들과 함께 드가, 르누아르, 렘브란트 등의 그림에 페인트를 퍼붓지만 프란시스 베이컨의 ‘고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 칼질을 하려는 부하의 행동을 제지한다. “예술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난 좋다”고 말하면서.

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쟁에 휩쓸렸던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1972)의 감독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1941~ )는 베이컨의 전시회를 보고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1924~2004)를 주연으로 발탁했으며 영화 가장 앞부분에 베이컨의 그림 두 점을 세 번의 쇼트로 화면에 담았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머리가 있을 뿐 얼굴은 갖고 있지 않다. 초상화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감추고 살아가는 본능의 발톱을 상징과 은유로서 베이컨의 그림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영화에서 폴을 총으로 쏜 잔느가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