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샘 테일러 우드의 '정물'과 '작은 죽음'비디오 카메라 이용 정물은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대상임을 폭로

1-빌렘 반 아엘스트의 '바니타스'
2-샘 테일러 우드의 '작은 죽음'
3-샘 테일러 우드의 '정물'

인간 행동의 밑바닥을 관통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힘이 결국은 성욕이라는 프로이트의 학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 되기에 충분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밥을 먹고자 하는 것도, 좋은 차를 사는 것도, 치장을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성욕의 발산이다.

프로이트의 이 학설이 상식적으로 너무나 극단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아들러나 융과 같은 그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범성욕주의(펜섹슈얼리즘)에 반발하여 그와 결별을 선언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성욕주의 못지않은 프로이트의 또 다른 극단적인 주장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본능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매우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쉽게 납득이 되지도 않는다. 인간의 심리 속에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면, 전대통령과 유명연예인을 포함한 최근의 충격적인 자살이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죽음 충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러한 이야기는 아니다.

프로이트는 말기의 저서 <쾌락 법칙을 넘어서>에서 죽음의 충동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쾌락을 지향하는 쾌락 법칙 이상의 어떤 것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실체는 이러하다. 모든 물질이 안정 상태를 추구하듯이 인간의 심리상태 또한 안정되고 균형된 상태를 추구한다. 예컨대 어떤 물질이 전자가 하나 많거나 적은 상태의 전하체가 되면 매우 불안정한 이온상태가 되어 반대 극의 물질과 결합하여 안정된 상태가 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역시 긴장감을 벗어나 안정성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정된 상태란 무기물처럼 자극과 반응의 감응이 0이 된 상태이다. 죽음이란 바로 이러한 상태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너바나)의 상태 또한 모든 욕망이 사라진 죽음과도 같은 경지일 뿐이다.

바로크 시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하였던 ‘바니타스’(Vanitas)는 일반적인 정물화와는 다른 정물화를 지칭한다. 보통의 정물화는 꽃이나 과일같은 대상물의 생생함을 나타내고자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존재의 무상함과 공허함을 의미하는 바니타스는 시들어버린 꽃이나 벌레 먹은 과일 등과 같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는 이 바니타스는 일반적으로 삶의 공허함과 무상함을 나타내는 교훈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그림은 단순한 교훈 이상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싱싱한 정물을 보고 싶은 충동이 있듯이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보고 싶은 충동이 있다. 말하자면 그 불쾌한 이미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정물을 볼 때는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반면 죽음의 이미지를 볼 때는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는 차이가 있을 뿐, 분명 두 대상 모두에 대한 시각적 충동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니타스를 즐기는 시각적 충동은 매우 잔인한 충동이다.

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에 속하는 영국의 작가 샘 테일러-우드(Sam Taylor-Wood)는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하여 바니타스가 담고 있는 이러한 시각적 충동을 완전히 구현하였다. <정물>(Still Life, 2001)이라는 작품에서 그녀는 탁자 위에 과일이 담긴 접시와 그 옆에 볼펜을 올려놓고 그 앞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카메라는 탁자 위에 있는 과일에 곰팡이가 생기고 미생물에 의해서 완전히 분해되는 과정을 아무런 느낌이나 과장도 없이 정직하게 담는다. 물론 펜은 그대로 있다. 그녀는 이렇게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매우 빠른 속도로 보여준다. 며칠간의 분해과정이 단 몇 분의 영상에 담아서 그 과정을 매우 잔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작은 죽음>(A Little Death, 2002)이라는 작품은 그러한 잔인성이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죽은 토끼를 탁자위에 벽에 걸친 채 올려놓는다. 그 옆에는 ‘정물’의 대상이었던 과일이 놓여있다. 카메라는 토끼의 주검이 부패되어 털이 벗겨지고 살이 발려지며 결국에는 뼈마저 없어지는 과정을 정직하게 담는다.

이번에는 펜 대신 탁자에 올려있는 사과가 멀쩡하다. 역시 이 작품 또한 며칠간의 부패과정을 단 몇 분으로 압축하여 감상자는 토끼의 육체가 분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정물’에서의 펜과 ‘작은 죽음’에서의 과일은 상대적으로 과일과 동물의 죽음이 주는 이미지의 충격을 배가한다.

그녀의 작품은 바니타스의 의미가 단순히 교훈적인 시각을 확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니타스 정물 자체가 또 다른 시각적 충동의 산물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바니타스 정물은 정물(정지된 사물)이 정물이 아닌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대상이라는 실재를 여지없이 폭로한다. 사람들이 바니타스에 끌리는 시각적 충동은 바로 정물 속에 감춰진 시간적 소멸, 즉 죽음이라는 실재에 대한 모습인 셈이다.

하지만 바니타스 정물 역시 매체의 한계 때문에 그러한 시간적 소멸 자체를 표현하는 데는 제약이 따랐다. 샘 테일러-우드는 잔인하게도 매체를 활용하여 그러한 제약을 제거해버렸다. 우리의 눈은 우리가 가장 보기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고자 하는 죽음의 모습에 대한 시각적 충동에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작은 죽음’이라는 제목은 바타이유가 말하는 ‘작은 죽음’(le mort petit)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바타이유는 ‘작은 죽음’을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한다. 바타이유는 작은 죽음이란 성적인 절정에 다다른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죽음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현실의 모든 구속과 통제로부터 벗어난 열반의 상태라면, 성적인 절정은 일시적인 열반의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타이유에게서 죽음과 쾌락적 충동은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통합된다. 샘 테일러-우드의 ‘작은 죽음’이 죽음 자체에 대한 시각적 충동을 유발하는 유희라면, 그녀의 ‘작은 죽음’은 바타이유의 ‘작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