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전',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굴절된 사회에 물음표

1-조현택 ‘낭만커플
2-조현택 ‘아지트’
3-박진영 ‘코스튬플레이’
4-최종규 ‘학교수업이 끝나면 모두들 서둘러 집으로 갈 뿐이다’
5-최은식 ‘야간자율학습’
1-조현택 '낭만커플
2-조현택 '아지트'
3-박진영 '코스튬플레이'
4-최종규 '학교수업이 끝나면 모두들 서둘러 집으로 갈 뿐이다'
5-최은식 '야간자율학습'

서구에서는 17세기 말부터 가족이라는 제도 내에서 아동의 독자성과 모성애에 대한 자각이 출현하고 이와 더불어 아동기에 대한 진정한 발견을 보여주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학교와 교육’이라는 아이들의 오랜 감금과정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장기간의 구속, 학교교육의 발달은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보호하고 바르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가족은 아이를 중심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큰 중요성을 부여해 아이들은 이제 과거의 익명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국민국가의 형성은 통일된 의식과 언어를 갖춘 국민의 양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면서 보통국민교육의 국가적 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아이들은 직접적인 생산관계에 편입되지 않고 학교라는 근대적 국민교육기관내에서 국민으로서의 통일된 자질을 갖추고 미래의 경제활동을 준비하는데 상당한 기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따라 아이들은 이제 생산현장이 아닌 가정과 학교에서 특별한 보호와 가르침의 대상으로 위치지워졌고, 독자적인 인생의 단계를 거치면서 성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계와 행동양식,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존재라는 관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아동과 청소년은 그렇게 해서 태동된 개념이다.

그러니까 청소년이란 근대 문명이 부과한 ‘아주 특별한 호명체계’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청소년은 건전해야 하고 순수하며 국가이 미래를 짊어질 인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러한 존재가 되도록 훈육받아왔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청소년은 순수할 거라는, 아니 순수해야 정상이라는 일종의 ‘망상’은 다름아닌 표상 혹은 호명체계의 위력이다.

여기서 순수함이란 달리 말하면 탈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청소년들이 성과 욕망은 가정, 사회에서 통제되기 시작했다. 대신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구성되어야 했다. 근대 이후 급부상한 가정교육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소년기의 성욕을 통제. 관리 하는 것이었다. 또한 청소년이란 표상에는 경제적 무능의 의미도 함께 들어있다.

청소년의 존재 기반은 다름아닌 학교와 가족이다. 청소년은 모범적인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효율적인 생산주체가 되기 위해 학교에서 공교육의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가는 세대이며 부모의 적극적(경제적)보호와 배려 속에서 대학입시를 향해 분투해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 현실 속에서 공교육 과정이란 다름 아닌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데 필요한 내용을 마스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오직 생산력이 습득에 필요한 교육과정만이 준거가 될 뿐이다. 이처럼 청소년이란 말 속에는 가족, 학교, 국가라는 개념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박혀있다.

청소년이 개별주체로서 존재할 통로는 어무데도 없다. 이 모호한 청소년기, 사춘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간의 한국미술사에서 청소년이라는 존재 자체를 물어보는 작품, 전시는 거의 부재했다.

오늘날의 사춘기 청소년들은 이른바 ‘문제적 인간’이다. 이들 사춘기 청소년들은, 교육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가 학생이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되고, 생산 능력의 향상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확립에 따라 장기간의 ‘공교육=국가 관리’가 가능해짐에 따라 비로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어쩌면 내적 불안정성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인간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불안과 방황은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며, 오히려 많은 부분 국가와 제도, 역사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하겠다. 청소년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 불안정한 좌표에 서 있을 것을 강요받아 왔고 강요받고 있다.

왜 현대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긴 과도기의 시간을 강제했을까? 제도와 권력의 거대한 체계에 확고히 순치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이란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전시가 현재 열리고 있다.

일민미술관이 <청.소.년전>,(일민미술관,6.19-8.23)은 9명의 사진가가 8개월 동안 촬영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이란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보고서 형식의 사진전시다. 청소년들이 문화, 생각, 생활, 주변 환경 등 섬세한 눈으로 포착한 사진들이다.

이 전시에 참여한 이들은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학원강사, 대안학교관계자, 교사 등도 포함되어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의 청소년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결과이자 뿌리라는 인식아래 기획되었다. 청소년들의 문화, 생각, 주변환경 등을 섬세한 눈으로 포착한 다채로운 사진들이 전시장 벽면에 가득하다.

보수언론사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 예민한 동시대 청소년문제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사진전시를 열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왜냐하면 청소년이란 존재를 다시 보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광우병 파동관련 촛불집회에 참석한 그토록 많은 청소년들로 인해서 불거진 연유가 있기에 그렇다.

조현택의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대안공간 풀, 6.23-7.10)은 작가의 사진앨범에서 출발한다. 그는 과거사진을 통해서 소년기의 자신과 조우하고 당시의 그 흩어진 고통을 추억한다. 그는 당시 사진앨범에서 본 중학생 즈음의 자신의 모습에서 지금보다 더 원숙미가 느껴지며 비장함이 넘치는 수컷의 눈빛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학습되고 길들여지기 이전의 남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당시 어린 자기와 친구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답습된 남성과 행위들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청소년기에 대한 조소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당시를 재구성한다.

자신의 고향 나주를 배경으로 하고 모교에서 발탁한 후배들을 모델로 이들과 함께 자신의 청소년기를 모방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일지도 모르는 친구들, 그들이 가졌던 야망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는 소년기의 야망이 원초적이며 마초적 행위에 가까운 소년의식임을 드러낸다.

사진은 결국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전시제목)고 말하지만 정작 그 권장하는 야망이 무엇이지 우리 사회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조소한다.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