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뿐 아니라 참신한 외관까지… 디지털 세대 총아로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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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패배했다.
배움이 항상 유익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허망할 정도로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다. 블로그가 생기기 전, 아니 윈도도 만들어지기 전 DOS 환경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기나긴 명령어를 타이핑하고 드라이브를 지정해주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나이 삼십이 넘어 마주한 이 생소한 친구에게 나는 최선을 다해 친근함을 표했다. 날밤을 새워 간신히 친해지고나니 윈도가 등장했다. 명령어의 자리를 대신한 아이콘은 얄밉도록 편리했다. 나의 노력이 졸지에 허섭쓰레기가 된 후에도 나의 컴과의 씨름은 계속됐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홈페이지 전성시대를 맞아 HTML 태그를 배워야 했고 JAVA 스크립트, 포토샵, GIF 파일, 플래시 등 끝이 없었다. 밥 먹는 것도 거르며 두께가 5cm가 넘는 책들과 씨름하던 나는 잠시나마 영광의 시기를 누렸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생 아들과 회사 부하 직원들을 모두 제자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포털이 블로그를 제공하면서 나는 신형 아파트에 밀려난 철거민 신세가 되었다. 이제 태그도 포토샵도 게시판도, 사용자가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클릭 몇 번으로 누구나 호화 아파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 서재의 한 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두꺼운 책들과 그 안의 지식들은 사장되어 간다.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급변하는 디지털을 좇기에 급급했지만 결국 손 놓고 있던 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디지털에 목매다가 뭉개진 한 아날로그 인간은 오늘도 저 두꺼운 책들을 버리지 못한다.
스스로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나무 무늬가 프린트된 비닐 장판은 참 생각할수록 웃기는 아이템이다. 애초에 비닐 장판을 개발할 것 없이 나무로 지은 집에 살았으면 벌이지 않았어도 될 촌극이다.
최근 어도비 사(社)는 포토샵의 새로운 버전 CS4를 출시하면서 인상 깊은 광고 비주얼을 냈다. 포토샵을 실행시켰을 때 열리는 기본 화면을 아날로그로 재현한 것이다. 칼로 자른 듯 반듯반듯한 메뉴와 툴바는 살짝 구겨진 듯한 종이와 비뚤비뚤한 물감통, 때 탄 장갑으로 다시 태어났다.
제목을 붙이자면 포토샵 비긴스 (photoshop begins) 쯤 될까? 전 세계인이 군말 없이 사용하는 최고의 그래픽 편집 소프트웨어 기업이 보완에 보완을 거듭해 만든 최근 버전을 하필 아날로그 비주얼로 표현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디지털은 태생상 싸구려다. 간편함과 대량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날 당시에 부여되었던 그 워낙에 신선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디지털 대신 아날로그를 무시하며 살았다. 이제 ‘오픈 빨’이 떨어지면서 우리는 디지털의 실체를 보고 있다.
MP3는 진공관 스피커의 깊은 음색을 재현하는 것이 최종 목표고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와 같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다. 로봇의 완성된 형태가 인간이듯이 모든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향해 간다.
디지털이 아날로그의 깊이를 소유하기 위해 또는 흉내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의도치 않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글의 초반에 언급한 디지털 패배자들은 억울하다 못해 망연자실하다. 모든 기술은 근본적으로 기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기술이 인간을 찾아오는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이 정도의 시간밖에 안 걸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술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좇기 위해 사용한 그 시간 동안 또 하나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그새 디지털에 눈이 익어버린 것이다. 실크 감촉으로 가공한 폴리에스테르 옷을 걸치고 시트지의 무늬를 진짜 나뭇결로 착각하며 살아온 세대에게 쩍 갈라진 나무의 단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거슬거슬한 촉감과 구역한 냄새, 원치 않는 벌레까지… 모든 게 새로움이고 디자인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아날로그라는 둥지는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로, 신세대에게는 신선함이 되었다. 이로써 아날로그는 그 본연의 깊이와 섬세함, 인간 냄새에 또 하나의 덕목을 추가하게 되었는데 바로 아름다움이다.
워드 프로세서의 매끈한 화면에 길들여진 눈에는 종이의 꾸깃함이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다. 축음기의 거대한 나팔과 필름 카메라의 정교한 디테일은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무덤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 구글, 애플 등 첨단 테크놀로지를 구현하는 기업들이 기능뿐 아니라 디자인에 있어서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추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아날로그는 호사이자 여유고, 유머이자 아름다움이다.
* 도움말: 前 전자신문 논설위원 유성호
* 본문 삽입 내용 출처: Blog.naver.com/epogue21
롤라이플렉스 디지털 카메라 |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