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파워갤러리] (10) 샘터화랑엄중구 대표, 회고전·세계진출등 3人의 화가와 아름다운 인연 이어가

샘터화랑과 인연을 맺은 단골 컬렉터들과 작가들의 이야기는 잘 짜인 드라마처럼 역동적이며 흥미롭고 또한 진지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샘터화랑의 엄중구 대표의 30여 년 간의 그림에 대한 애정과 그에 대한 쉼 없는 탐구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단골 컬렉터들의 사연도 재미있지만 샘터화랑을 통해 오랜 시간 담금질한 예술세계를 펼쳐온 작가들과의 만남은 여섯 시간의 인터뷰 시간 동안 지루함 없이 지났다. 그 중 엄 대표가 만난 세 명의 작가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고 동시에 갤러리의 색채를 결정짓는다.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를 그리는 전혁림과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는 손상기, 그리고 묘법을 창안한 박서보가 그들이다.

통영출신의 전혁림 화백을 엄 대표가 처음 알게 된 건 화랑을 오픈 한 해인 1978년. 부산 공간화랑에서 작품을 보고 첫 눈에 반한 그는 1980년부터 10년 동안 전혁림 화백을 전속작가로 모셨다.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표현을 하던 그는 국내에서 소위 ‘잘 팔리는’작품을 그리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를 알아보는 눈만은 곳곳에 살아있었다. 1979년 계간미술(월간미술의 전신)에서 과소평가 작가로 첫 손에 꼽힌 그에 대해 한 평론가는 ‘인구에 회자되는 죽은 열 사람과도 바꿀 수 없는 작가가 전혁림’이라고 말했다.

1987년 엄 대표가 뉴욕 소호에서 한 달간 전혁림 작품을 전시할 당시에 전시를 제안하며 찾아온 볼티모어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오케스트레이션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격찬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서서히 알려지면서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고 이영미술관에는 박생광 화백과 함께 가장 많은 컬렉션이 갖추어져 있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역사, 철학, 예술 서적을 섭렵한 분이시죠. 제겐 서양미술의 멘토 같은 분입니다. 이 그림을 보세요. 문자그림인데, 기쁠 희(喜)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그려내고 있어요. 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시죠. ‘예술은 전투적이고 도전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요. 고구려적인 기상과 색채가 있는 미술을 찾아내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이 아니라, 평생을 학생처럼 예술의 진리를 그림 속에 표현하려고 하셨던거죠.”

현재 통영에서는 전혁림 미술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그의 대표작을 소장한 샘터화랑에서도 작품을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엄 대표는 밝혔다.

최근 몇 달 사이 샘터화랑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고 있는 전시는 손상기 전이다. 작품 보는 눈이 유난히 까다롭던 전혁림이 1983년 어느 날 엄 대표에게 말했다.

“어서 동덕 미술관에 가보요. 시커먼 미술이 빛을 발하요. 되게 좋소. 그런 미술품 참 없소. 하지만 곯아죽을 미술이요.(안 팔릴 미술이라는 의미) 그러니 엄 대표가 잘 해보시오.”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달려간 미술관에는 손상기 작가 혼자만이 테이블을 지키고 있었다. 산소호흡량이 적어 빨개진 한 쪽 눈과 휘어진 척추를 가졌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했다. 며칠 후 아현동 굴레방다리에서 화실을 하며 살아가는 손상기 작가를 찾았다. 그는 이번에도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낙향을 해야 하는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첫 전시를 할 때 굶으면서 구걸하면서 그린 그림이라는 글을 손 화백이 쓰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죠. 지방대 출신의 무명화가였지만 작품은 쟁쟁한 원로 화가분들이 먼저 알아보시더군요. 전혁림, 권옥연, 장욱진, 임직순, 박고석 화백은 아무 연고도 없는 손 작가를 찾아와 격려하셨습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손상기 작가가 싸구려 선술집의 직업여성의 고달픈 인생을 누드로 그린,‘취녀’를 구입하기도 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엄 대표가 다시 구입하기도 했다.

마흔 살을 채우지 못하고 서른 아홉에 삶을 마감한 손상기의 전시를 엄 대표는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2004년 회고전과 함께 근사한 화집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이다.

“1985년쯤 80만원에 팔렸던 작품이 2년 전 한 옥션에서 7천 만원이 넘게 팔렸더군요. 그만큼 작품에 대한 수요가 많지만 제가 가진 작품은 경매에 내놓지 못해요. 돈을 많이 주는 것보다 작가에 대한 애정이 우선이라는 것이 유족은 물론 저의 생각이기도 하죠. 또 여수시에는 손상기 작가의 후배들로 이루어진 기념사업회도 있답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손상기 20주기 회고전에는 1만 2천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좋은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져서 행복하다는 엄 대표다.

전혁림, 손상기 작가 외에 최근 몇 년 사이 샘터화랑은 박서보 화백을 중심으로 한 모노크롬과 중국 신진 작가들에 힘을 쏟고 있다. 1961년 세계청년화가의 파리대회에서 1위로 선정된 박서보 화백은 6년 전 샘터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어 세계 미술계를 겨냥한 1인 전을 세계 각지의 아트페어에서 선보이고 있다. 작가의 소개와 판매를 주 목적으로 하는 아트페어에서 한 작가를 전적으로 소개하는 일은 위험부담이 크지만 엄 대표에겐 확신이 있어 보였다.

“독창성이 있습니다. 박서보 선생은 미니멀리즘과는 달라요. 자연주의에서 비롯되었죠. 70년대 유화물감을 칠한 캔버스에 작업한 백색묘법을 했지만 지금은 캔버스 위 한지에 요철을 만들고 아크릴 물감(수성으로, 먹처럼 한지가 흡수한다)을 칠합니다. 물감이 말라야 색이 나오는 거라서 미리 계산을 하고 수없이 많은 색을 섞습니다.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고유의 색인 거죠.”

마티에르가 뛰어난 덕에 박서보 화백은 세계적 작가들이 수록된 미국 미술대학의 교재(Art Fundamental Theory and Practice)에 백남준 외에 국내작가로는 유일하게 등장한다.

2년 전 상하이에 지사를 설립한 후 천리주와 천루오빙이라는 중국 추상화가를 발굴한 엄 대표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위해 내달 지사장을 파견할 예정이다. “손상기 같은 작가 한 명만 발굴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상화가가 중국에서는 비인기 장르였지만 5년을 내다보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앞당겨지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친 후 전시 중인 손상기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엄 대표가 가진 태도는 분명 딜러로서의 책임감내지는 애정 이상이었다. 2년 후, 양평에 샘터화랑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 하나를 마련할 예정이라던 엄중구 대표. 하버드 출신의 건축가인 둘째 아들이 이미 설계까지 마친 미술관은 자연광이 비치는 멋스러운 곳이 될 듯하다.

샘터화랑


1978년 9월1일 설립된 샘터화랑은 현재 청담동에 본사를 두고 있다. 처음 고미술품을 전문으로 하는 조한방이란 이름으로 화랑을 오픈한 이후, 샘터로 이름을 바꾸어 현대미술까지 아우르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를 그리는 전혁림 화백이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전속작가였으며,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리는 故 손상기 화백과 1983년과 인연을 맺어 매년 개인전과 작고 후에도 전시와 작품 컬렉션을 하고 있다.

현재는 모노크롬의 대가 박서보 화백과 유형근 화백의 세계 무대 진출과 중국 작가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샘터화랑의 엄중구 대표는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 대표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