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보리스 베나윤 '워치 아웃'미디어 통한 바라봄과 바라보여짐의 전도현상을 표현

1-마르셀 뒤샹 '주어짐'
2-모리스 베냐윤 ‘Watch-out’ 설치 장면
3-모리스 베냐윤 ‘Watch-out’ 시리즈=아트센터 나비 제공
1-마르셀 뒤샹 '주어짐'
2-모리스 베냐윤 'Watch-out' 설치 장면
3-모리스 베냐윤 'Watch-out' 시리즈=아트센터 나비 제공

한 남자가 복도를 걷고 있다. 한 여인이 살고 있는 이웃 방을 지나다 그 속에서 인기척을 느낀 그는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열쇠구멍 틈으로 살며시 그녀의 방을 들여다본다. 그녀가 거실을 움직이는 모습이 작은 열쇠구멍 사이로 보인다.

왠지 모를 흥분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때 복도 한 편에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순간 멍해진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열쇠구멍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다.

이 장면은 실제로 그가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복도 한편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보게 될 광경이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 되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순간 자기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그는 수치심을 느낀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러한 타자화된 자신의 시선을 ‘응시’(le regard)라고 부른다. 이 응시의 시선은 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시선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둔갑하여 자신을 옥죈다. 커피를 마시거나 길을 걸을 때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순간조차도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 즉 응시로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을 보려는 욕망의 시선은 거꾸로 타자의 시선이 되어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다.

1968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사망한 후 최초로 전시된 그의 작품 <주어짐>(Étant Donée, 영역하면 Being Given)은 전시를 보려는 관객들의 시선 자체를 수치스러운 응시로 바꾸어놓는데 성공하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초연된 이 전시의 전시장을 들어서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곧바로 오브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전시장은 벽으로 막혀져 있으며 사람들은 뒤샹이 의도적으로 갈라놓은 틈을 통해서 벽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벽의 내부에는 한 여자가 길게 누워서 적나라하게 자신의 음부를 노출하고 있다. 순간 관객은 당황해하면서도 그녀의 음부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그 누구도 순간적이나마 관음적인 시선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객이 남자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어떤 이유에서건 그 음탕한 시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 벽안에 무슨 광경이 나타나게 될지를 모르는 다른 관객들이 뒤에서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의 시선은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의 시선이지만, 그에게 이들의 시선은 수치심을 느끼게 할 만큼 충분한 감시의 눈초리로 둔갑한다. 관객은 자신의 관음증적 시선과 타자의 응시라는 분열을 겪으면서 불편하게 그 음탕한 광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설혹 뒤에 기다리는 관객이 없다하더라도 벽안을 들여다보는 관객은 충분히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벽안에 있는 여인의 음부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성적 암시를 지닌 먼 배경의 폭포와 함께 여인의 적나라한 음부는 보는 관객의 시선을 매우 당혹하게 한다.

이는 마치 쿠르베(Gustav Courbet)의 <세계의 기원>(L'Origin du Monde)을 볼 때와 같은 당혹감을 던져준다. 이 그림은 음부가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부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을 오히려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을 수치스러운 응시의 시선으로 바꾸어놓기에 충분하다. 더군다나 자세를 잡고 갈라진 틈 사이로 벽 내부의 광경을 바라보려는 관객의 적극적인 행위 자체가 스스로 수치심을 유발하여 시선의 역전을 용이하게 만든다.

프랑스의 미디어 예술가인 모리스 베나윤(Maurice Benayoun)의 대표작인 <워치 아웃>(Watch-Out, ‘조심해’라는 뜻도 있지만 ‘감시하다’, ‘주의 깊게 보다’, ‘바깥을 보다’ 혹은 ‘바깥에서 본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인 듯한데)은 미디어를 통하여 바라봄과 바라보여짐의 전도현상을 잘 표현한다. 국내 아트센터나비에서도 전시되었던 그의 작품은 원래 길거리에 설치된 설치작품이다.

2004년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아테네의 한 번화가에 그는 노란색과 검정색 줄이 쳐진 작은 상자를 설치하였다. 교통안전표시물처럼 주의를 요구하는 이 상자에는 두 눈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두 개의 구멍이 파져있다. 호기심어린 보행자는 박스 앞에 놓인 발판위에 올라서서 두 눈을 구멍에 가져다 댄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두 눈 앞에는 작은 스크린이 나타나며, 거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낼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시오’라는 텍스트 메시지가 뜬다. 이 명령의 메시지와 함께 이전의 관객이 보냈던 메시지도 함께 나타난다.

베나윤의 기발함은 여기에 있지 않다. 관객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눈을 구멍에 대는 순간 상자 안에 설치된 카메라가 관객의 눈을 찍는다. 그리고 그렇게 접사된 관객의 눈은 상자 외부의 길거리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을 통해서 화면에 매우 크게 나타난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전광판을 쳐다보면 마치 커다란 눈이 자신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하여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어린 주의의 눈길이 감시의 눈길로 역전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서 관객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주의와 호기심의 ‘워치아웃’은 행인을 감시하는 경계의 ‘워치아웃’이 된다. 이는 사르트르의 응시나 뒤샹의 ‘주어짐’에 대한 단순한 미디어 예술 버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베나윤의 작품은 미디어 자체가 사르트르의 응시나 뒤샹의 관음증적 시선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곳까지 닿고자 하는 미디어의 관음증적 시선은 거꾸로 사람들 자신을 항상 감시하는 응시의 눈초리를 띠고 군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응시의 눈초리가 바로 미디어 시대의 파놉티콘일 지도 모른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