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만에 완성되는 패스트 패션과 시대초월 빈티지 당신의 선택은

1-뉴욕 5번가의 자라 매장
2-forever 21의 쇼핑백 by tokyo fashion
3-하라주쿠의 톱숍 매장 by tokyo fashion
4-빈티지 소품 by Bella Seven

패션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을까?

유행했던 나팔 바지가 다시 돌아오는 속도, 재봉틀 돌아가는 속도, 런웨이 위를 걷는 모델의 속도, 옷장 한 가운데를 차지하던 코트가 헌 옷 보관함으로 옮겨지는 속도. 각자 다른 바퀴를 돌리면서 맞물리며 결정되는 패션의 속도 말이다.

생산자의 관점에서 보면 속도는 일종의 경쟁력이다. 패션은 매년 S/S와 F/W 두 개의 주기를 기준으로 돌아가고 전 세계의 패션 시계는 여기에 맞춰져 있다. 겨울 옷은 봄에 만들어지며 여름 옷은 가을에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모피 패션쇼를 보기도 하고 목도리를 칭칭 동여맨 채 상큼한 봄 스커트를 구경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몇몇 SPA 브랜드가 실현한 생산 시간의 단축은 아주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2주 만에 기획부터 디자인, 제조, 물류, 유통까지 전부 해치워버림으로써 패션의 도박성을 줄일 수 있었다. 6개월에 한 번 데이트하는 남자 친구와 2주에 한 번 데이트하는 남자 친구 중 누가 더 연인의 취향을 잘 알 수 있을까와 비슷한 문제다(물론 매일 만나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마냥 정비례 곡선을 그릴 것만 같은 속도와 경쟁력의 그래프는 어느 지점에 이르면 우리의 상식을 배신한다. 속도가 거의 0으로 수렴될 때, 이제는 언제 만들어졌는지조차 까마득하게 잊혀지고 신선함은커녕 옷의 생명력이 다 증발해 버릴 그 즈음에, 더께로 쌓인 시간은 옷에 또 다른 경쟁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고, 지금은 지루하고 고지식한 것으로 치부되는 장인 정신의 남겨진 조각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언제 만들어진 옷인가? 이틀 전? 6개월 전? 3년 전? 아니면 30년 전인가?

이틀 전에 만들어진 옷

엊그제 떴던 비행기가 오늘 또 다시 떴다. 스페인발 비행기는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인천공항에 착륙한다. 부지런히 내려진 옷들은 전국 7개의 자라 매장으로 분산된다. 하루 걸러 한번씩 자라 매장을 들러도 매번 처음 보는 옷들이 있다.

지금 가장 빠른 패션의 중심에는 SPA가 있다. Special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의 약자인 SPA는 쉽게 말해 수직 통합 구조로 한 회사에서 기획과 디자인, 제작, 물류, 유통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뜻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시간 단축이다. 자라의 모회사인 인디텍스 그룹은 보통은 한 시즌이 소요되는 이 거대한 작업을 2주로 줄여버렸다.

200명의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끝내면 스페인과 주변 국가에서 제작에 들어가고 완성된 옷은 다시 스페인 본사 물류 센터로 집합된다. 여기서 전 세계로 다시 분배되는데 유럽 지역은 24시간 안에, 아시아 지역은 48시간 안에 고객의 손으로 떨어진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2주다.

시간 단축을 통해서 그들이 얻는 것은 적중률이다. 일반적인 어패럴사가 시즌 전에 전체 물량의 60~70%를 만들어 놓고 나머지를 고객 반응에 따라 기획하는 것과 달리 자라는 15%의 키 컬렉션만 미리 생산해 둔다. 초두 물량이 매장에 풀리는 시점부터 생산 사이클은 다시 가동된다. 반응이 좋은 옷은 리오더를, 반응이 나쁜 옷은 중단을, 없는 옷은 새로 제작해 일주일에 두 번씩 보낸다.

현지 트렌드를 물 샐 틈 없이 캐치하기 위해 각 매장마다 매니저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다.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전화로 이루어진다. 메일이나 주고 받고 있을 시간이 없다. 스페인 본사에는 지하 터널이 뚫려 있다. 빠른 물류를 위한 파격적인 대안책이다.

무엇에든 진득하지 못한 현대인들의 자가 반성은 패스트 패션을 곱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했다. 짧으면 한 계절, 길어 봐야 2년, 유행이 가고 나면 쉽게 버려지는 옷들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아이덴티티를 포기하고 트렌드 앞에 완벽하게 굴복한 패스트 패션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누구나 트렌디해지고 싶잖아요? 합리적인 가격으로 나도 유행하는 옷을 입고 싶다는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이 패스트 패션의 강점입니다.”

디자인에 치중해 마감의 질이나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어 왔다. 그러나 비싸게 주고 산 옷도 어차피 2년 후에는 미워 보이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소위 명품이라면 모를까. 명품과는 완전히 다른 시장이니 지속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장점은 보지 않고 죽어라 단점만 들추어 내려는 얄미운 발언이라며 반박해도 할 말은 없을 것 같다. 환경 오염 문제에 대해서도 당당하다.

“반응이 좋다고 해서 물량을 엄청나게 늘리는 게 아닙니다. 모든 옷이 다품종 소량 생산이죠. 덕분에 재고량을 확연히 줄일 수 있습니다. 일년에 두 번 있는 시즌 오프 세일 때 거의 대부분의 옷들을 소진합니다.”

자라, 망고에 이어 H&M, 톱숍 등 세계적인 SPA 브랜드들이 한국 진출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예상 격전지는 명동이다. 모든 사람들이 앙드레 김처럼 흔들리지 않는 심미안을 갖지 않은 이상 변화에 대한 욕구는 항상 존재한다. 그렇다면 패스트 패션은 빨리빨리 변하는 트렌드에 몸을 실을 수 있는 합리적이고 유일한 대안인 셈이다.

5-로미와의 빈티지 주얼리
6-빈티지 다락의 드레스
7-빈티지 소품 by Miss JJi
8-빈티지 구두 by La mechante

30년 전에 만들어진 옷

연락을 받고 찾아간 그곳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하이힐에 지쳐 절뚝거리다가 늦을 것 같다고 전화하기만 두어 번, 끝내 성마르게 택시를 잡아 타고 도착한 게 무색할 정도로 그곳은 30분 정도 더 늦어도 상관 없을 것처럼 시간이 정지된 곳이었다.

스물 다섯 살의 어린 사장인 희연씨는 도예과를 전공하던 대학 재학 시절부터 빈티지 의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기억나는 일은 늘 무언가를 만들고 부쉈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재료를 사다가 작품을 만들어 한 번 전시하고 나면 그대로 쓰레기가 되었다. 매번 한 보따리의 쓰레기를 치우며 새로 무엇을 만든다는 것에 점차 회의를 느꼈다.

물론 이것이 계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를 빈티지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80년대의 숨결을 지닌 빈티지 구두들이었다. 어퍼(upper:신발의 윗부분)는 물론이고 밑창까지 가죽으로 공들여 댄 신발들은 요즘에는 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니까.

빈티지를 가르는 기준은 정확치 않다. 보통 100년 이상 된 것을 앤티크(antique)로 분류하고 앤티크부터 80년대까지 생산된 제품을 빈티지라고 부른다. 최소 20년은 묵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오래된 것이 곧 빈티지는 아니다. 1960~1980년대 유럽과 미국, 일본의 부티크에서 만들어진 맞춤복들, 당대의 패션 경향을 반영하면서 꼼꼼하게 바느질 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롭던 시절에 만들어진 옷들이 빈티지다.

그럼 국내에서 만들어진 옷들은 빈티지가 될 수 없을까? 국내 생산된 중고 의류도 많지만 가격을 지불하고 그것을 사려는 수요층이 없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빈티지로 분류되지 못하고 있다.

빈티지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세계다. 마니아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이 세계에서 빠르게 떴다가 스러지는 트렌드는 관심 밖이다. 공급되고 강요되는 미의 기준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색깔을 표현하는 것이다. 빈티지는 이들에게 보물 창고를 열어 보인다. 지금처럼 붕어빵 찍어내듯 패션을 찍어낼 기술이 부족했던 과거, 트렌드의 발신지는 대기업이 아닌 기술을 가진 개인이었고 이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옷을 만들었다.

현재에 와서는 지나치게 간소화 되어버린 프린트나 장식, 마감 공정, 옷 한 벌에 들어가는 정성까지, 그 당시에는 주렁주렁 옷이 무거워질 정도로 풍성하게 달려 있었다. 지금은 웃돈을 지불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소재와 정교한 공정, 섬세한 패턴이 그때는 당연한 것이었다.

속도라는 게 아예 없는 것 같은 빈티지의 세계에서도 가끔 성급함을 목격할 때가 오는데 바로 옷을 구매하는 순간이다. 현재 홍대 앞과 온라인 매장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빈티지 시장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옷을 손에 넣기 위한 치열한 경쟁지다. 구두는 사이즈 별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희귀하다.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고 돈을 입금하는 과감함은 필수고, 설령 놓치더라도 구매자에게 메일을 보내 ‘혹시 싫증 나면 저에게 파시라’고 매달리는 끈질김도 요구된다.

빈티지는 지금보다 조금 더 느리고 넉넉했던 시절이 남긴 유산이다. 앞으로 30년 후의 세대는 우리 시대의 무엇을 그리워할까? 2009년의 옷은 빈티지가 될 수 있을까?

도움말: 자라 코리아 백아름 매니저

빈티지 다락 김희연 대표 (www.vintagedarak.com)

로미와 이유미 대표 (www.romiwa.com)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