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지향하는 정치성, 일방적 소통 예술의 본질 흔들어

1-서울 성산동 임대 아파트 주민의 취재장면(아트 인 시티 2008)
2-대구 성서 공단에서 있었던 이주 노동자 관련 공공미술 작업( 아트 인 시티 2007)
3-‘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
2006년과 2007년에 문화부에서 추진한 공공미술사업 ‘ART IN CITY’는 전시장이나 작업실에 갇힌 미술의 협소한 시야를 넘어 공공의 장으로 미술을 확대시켰다.
1-서울 성산동 임대 아파트 주민의 취재장면(아트 인 시티 2008)
2-대구 성서 공단에서 있었던 이주 노동자 관련 공공미술 작업( 아트 인 시티 2007)
3-'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 캠퍼스
2006년과 2007년에 문화부에서 추진한 공공미술사업 'ART IN CITY'는 전시장이나 작업실에 갇힌 미술의 협소한 시야를 넘어 공공의 장으로 미술을 확대시켰다.

예술에서의 이론 교육, 그리고 이론에서 통섭을 지향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육방향 및 방법에 대한 문화부의 이의제기로 촉발된 양자 사이의 갈등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 질문을 야기한다. 문화부와 한예종 사이의 갈등은 양측이 예술의 자율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차이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정부 산하기구인 문화부가 한예종을 불온한 좌파 문화 권력의 근거지로 간주하고, 순수한 예술 교육의 산실로 몰아붙이려는 압력으로 비추어진다. 한예종으로서는 관료 집단의 간섭 자체를 예술의 자율성의 훼손으로 간주하고 이에 저항하고 있다.

사실 우파는 경쟁력을 중시하고 좌파는 진보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양측 모두에게 예술의 자율성이란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한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누구는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누구는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이 모두 예술에 대한 순정을 주장하고 있으며, 서로가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예술은 자율적이지만도 정치적이지만도 않다. 그러나 정치적 지향이 다르면 예술에 대한 생각도 다르다. 자율성이 침해되면 싸워야 하고 그러려면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의 자율성을 흔드는 것은 정치와 시장이라기보다는, 시장을 지향하는 정치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문화부는 미술의 전문성을 강조하면서도 유서 깊은 대학로의 미술 전시장(아르코미술관)에서 ‘미술’자를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으며,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일방적 국책 사업의 선전을 위해 ‘대한 늬우스’까지 부활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자율과 정치적 선전은 자기 입맛에 맞게 언제나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은 마치 자명한 진리처럼, 선험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지고한 가치로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역사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예술의 자율성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가치가 아니라, 예술가가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떠밀려나가기 시작했던 근대에 발생하였고, 역사적으로 생성되었기에 변화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예술이나 예술가의 자율성은 사회에서의 낙오이자 사회를 초월하는 빛나는 가치였고, 소외이자 해방인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점만 말하자면, 예술은 기성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에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기성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의 가치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근대의 이상적 예술가상이다. 그러나 시장주의의 보편화와 내재화로 인해 근대적 거리감이 현대적 거리 상실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예술이나 예술가에 대한 전망이나 기대도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자율성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그 맥락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역할 뿐 아니라, 사물들조차도 분화가 아닌 통합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것이 근대적 분업화와 기계화의 정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현대에 요구되는 통합성이라는 것이 근대적 총체성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할지라도, 학교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그런 이상을 꿈꾸고 싹트게 해줄 수 있는 것인가.

이상은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추동하는 힘이 된다. 먼저 국내 유수의 미술대학에서 조차 실기고사 비중을 줄이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실기에만 몰입하는 것이 예술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술에서의 이론의 위상을 강조하는 것이나 이론에서의 다학문적인 접근을 지향하는 교육방식은 순수해야할 예술에 불순한 무엇을 섞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진정한 자율성을 갖게 만드는 수단이자 무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율적이기 위해서는 자율적일 수만은 없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자신의 예술적 목표를 단지 꿈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표 뿐 아니라, 그 목표가 놓여있는 맥락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비전을 체험하지 못한 작가 후보생은 자기에게 갇혀있게 된다.

자기에게만 갇혀있는 것을 예술적 개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미술에서의 실기의 위상은 미술학원이 몰려있는 홍대 앞에 가보면 확연하게 느껴진다. 미술대학보다 몸집을 불리고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삼키는 그곳에서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기술과 기능을 거의 익힐 수 있다.

입시 학원 같은 교육기관(?)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대안의 교육을 위한 장이다. 사적 이익을 위해 사업을 하는 학원과 공공성을 담보해야할 대학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 대학도 브랜드 가치를 따지고 상업화되고 있다. 한창 미술시장 붐이 불었을 때 실기실과 화랑과의 관계는 매우 근접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자율적이고 싶어도 자율적일 수가 없다. 삶 자체가 자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끊임없이 자율성은 침해받는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물론 예술 자체를 못하게 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미리 정글의 법칙을 체득해야 하는가.

미리 미리 기성질서를 내면화해야 하는가. 역설적인 것은 대부분 기성 질서의 요구자체가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성질서는 한 가지 기능에 충실한 기능인을 원하면서도 이익을 위해 팔방미인처럼 일을 처리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은 매우 크다. 사회가 원하는 기능인이 되기 위해서 개인에게 모든 부담을 지우면서도, 정작 그 기능이라는 것의 유효 기간은 길지가 않다. 그것이 기성질서가 개인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방식 아닐까. 기능인은 쉽게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편협한 의미의 순수와 자율은 기성 질서에 쉽게 순응하며 이용되고 유린된다.

기성질서가 조금만 흔들어도 쓰러지는 나약함이 아니라, 더욱 강인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전인적인 소양이라는 것이며, 지배적 질서가 말끝마다 강조하는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고등교육 기관은 그것을 갖추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문화부가 강조하는 실기위주의 교육은 일견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현대사회에 맞는 방식인 듯 보이나, 이는 예술 교육을 축구나 수영 같은 분야의 선수를 양성하는 과정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현대미술은 명확한 전범이 있는 클래식 음악이나 무용 같은 장르와도 다르다. 또한 기능이라는 것도 동기만 주어지면 각자 찾을 수 있고 찾아야만 한다. 그 부분이 작가와 작품의 독창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뭘 파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파기만 하는 협소한 시야를 전인적인 예술 교육이 극복해 줄 때 시야는 넓어지고, 맥락을 제대로 맞춘 전문적 기능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