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과 여성화가 도라 캐링턴 그리고 리튼 스트라치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사이 방황하는 연인

1-케링턴,‘ 스트라치의 초상'
2-영화 '캐링턴'
3-‘Spanish Landscape with Mountaines circa’(1924)
1-케링턴,' 스트라치의 초상'
2-영화 '캐링턴'
3-'Spanish Landscape with Mountaines circa'(1924)

사랑이 빠진 예술작품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하도 넓고 다양해서 세상에 사랑 아닌 것이 없다고도 하지만. 청교도적인 도덕성이 요구되고 욕망은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하여 육체를 폄하하고 사랑과 성을 억압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정말 고통스러운 사랑을 감내했던 사람들이 있다.

화가 도라 캐링턴(Dora Carrington,1893~1932)과 전기작가 리튼 스트라치(Lytton Strachey, 1880~1932)가 그들이다. 13세의 나이 차이와 동성애자인 리튼의 성정체성에도 불구하고 17년 동안 두 사람은 기이한 사랑을 이어간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의 희생자를 낳는다.

이런 두 사람의 평범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담은 영화 <캐링턴>(1995년작)은 리튼의 일대기를 마이클 할로이드가 1967년과 68년에 2부작으로 펴낸 전기소설 <리튼 스트라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는 리튼을 사랑했던 비극적 여인 도라 캐링턴으로 바뀌었지만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햄튼의 감독 데뷔작으로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바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전쟁과 예술가들의 독설을 피해 조나단 프라이스가 연기한 리튼은 영국의 남부 해안가 한 마을로 옮겨간다. 그가 찾은 곳은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의 언니 바네사(Vanessa Bell,1879 ~1961)의 집. 부모가 죽고 의붓 형제들과의 불화로 동생 버지니아와 남동생 토비(Thoby), 에드리언(Adrian)과 함께 블룸즈베리로 이사했는데 영화에서는 바닷가 마을로 설정되었다.

이곳에서 예술가과 작가, 지식인들이 자연스럽게 만났고 이후 사람들은 이들을 ‘블룸즈베리 그룹’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유로운 이성과 미 그리고 우정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20세기 초 영국 런던문화와 지성의 산실이 되었다. 이곳에 참여한 면면을 살펴보면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 C.벨, 화가 덩컨 그랜트, 바네사 벨, 그리고 캐링턴과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버지니아 울프, 경제학자 존 케인스 등이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리튼은 공을 차고 놀던 단발머리의 소년(?) 캐링턴(엠머 톰슨)을 보고 그녀의 보이쉬한 모습에 반한다. 사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양성애자였다. 그녀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목을 드러내는 짧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였다. 그 당시 화가 마크 거틀러(Mark Gertler,1891~1939)와 사귀고 있었지만 그의 청혼도 거절한 채 리튼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1917년 캐링턴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남들과 달라요.”라는 말과 함께 서로 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 정체성 때문에 육체적인 사랑보다 정신적인 플라토닉한 사랑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둘의 사랑은 서로간의 예술적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캐링턴은 리튼을 위해 그의 침대 머리 벽에 에덴동산을 가득 그려 채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에 낙원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근육질의 몸과 정열적인 성격을 가진 스티븐 워딩턴이 분한 랄프 파트리지가 나타난 때문이다. 랄프는 캐링턴을 만나자마자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동성애자인 리튼은 랄프에게 빠져드는 기구한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캐링턴은 랄프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고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결국 리튼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랄프와 결혼한다. 물론 리튼도 캐링턴에게 랄프와의 결혼을 권하지만. 둘 사이의 불완전한 사랑을 랄프를 통해서 메우려는 듯. 이런 긴장감 넘치는 기이한 사랑은 랄프가 다른 여자를 사귀기 시작하면서 깨지고 만다.

캐링턴은 랄프의 친구인 문학청년같이 순수한 작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제럴드 브레넌(Gerald Brenan,1894~ 1987)과 사랑에 빠지고 브레넌은 캐링턴에게 결혼해서 스페인으로 떠나자고 조르지만 리튼은 캐링턴이 그린 브레넌의 초상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고 그가 캐링턴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되새긴다.

그래서 둘의 결혼을 은근히 방해하면서 캐링턴을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캐링턴도 여전히 리튼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여기에 랄프는 법적으로 캐링턴과 이혼했지만 집을 돌봐주기 위해 주말이면 리튼과 캐링턴이 살고 있는 집을 찾는다.

리튼이 쓴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 Eminent Victorians, 1918>이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지만 그는 런던에 나가 여전히 젊고 예쁜 남자들을 탐닉한다. 하긴 리튼은 버릇처럼 “사랑할수록 같이 살아선 안 돼.”, “자궁을 가진 동물은 모두 불쾌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사랑했던 캐링턴, 그리고 이런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 운명의 여인 캐링턴의 이야기는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이어진다.

어느 날 파티가 끝나고 랄프는 그의 젊은 아내와, 리튼은 젊은 남자연인과 방으로 올라가 불이 꺼질 때까지 정원에서 바라보는 캐링턴의 소리 없는 흐느낌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결국 이렇게 모두에게 소외된 캐링턴은 제레미 노덤이 연기한 10년 연하의 화가 비커스 펜로즈(Beacus Penrose, 1903~1988)를 만나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지만 공허할 뿐이다.

그녀는 더욱 깊은 허탈감에 빠져들고 그런 그녀를 보다 못 해 리튼과 주변 친구들은 개인전을 열어보라고 제안하지만 그것도 거부한 채 오직 자신의 그림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19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던 리튼이 갑자기 쓰러진다. 그녀는 24시간 간호사와 함께 그의 병상을 지킨다. 이혼 후에도 집사처럼 집을 드나들던 랄프는 힘들어 하는 캐링턴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임종이 다가온 리튼은 마치 유언처럼 17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말을 한다. “나는 언제나 당신 캐링턴과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라고. 이 말을 들은 캐링턴은 절망한 나머지 차고로 가 자살을 시도하지만 랄프가 발견하고 살려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링턴과 랄프는 리튼의 임종을 지킨다. 그 후 마치 생을 정리하듯 리튼의 집으로가 그의 유품을 태운다. 그리고 “나는 비어있는 책이다. 나는 빈 방에서 혼자 울고 있다.” 읍조리면 사냥용 엽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이 영화는 캐링턴을 중심으로 주변 남성들과의 사랑과 방황 그리고 고뇌를 담은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화가 캐링턴의 삶과 예술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겉으로는 근엄하지만 타락한 성문화가 만연했던 시기에 육체적인 사랑과 진정한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적인 면에 앵글을 맞추었다.

캐링턴에게 리튼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랑이자 독이었다. 하지만 하와의 사과처럼 달콤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까지 따 먹어야 할 만큼.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