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마르셀 뒤샹의 작품과 이자와 코타의 비디오아트작품 통해 소통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줘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는 어느 날 한 유명한 마임 배우의 공연을 보았다. <피에로, 그 아내의 살인자>라는 제목의 마임극이었다. 그는 <마임극>(Mimique)이라는 책에서 극의 내용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그 정도로 크게 감명을 받은 듯하다. 내용은 이러하다.

주인공 피에로는 아내 콜럼바인의 간통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격분한 그는 돌부리를 걷어찼지만, 돌아오는 대가는 발의 통증뿐이었다. 아픈 발을 문지르던 그는 우연치 않게 자신의 몸을 간질이게 되었다. 이때 그는 아내의 복수를 다짐하고 그녀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가 택한 방법은 교살이나 독살이 아닌 간질어서 죽이는 것이었다.

일인 마임극에서 배우는 자신이 피에로이자 동시에 아내 콜럼바인의 역할을 모두 맡아서 연기한다. 따라서 피에로가 아내를 죽이는 장면은 스스로 자신을 간지럼 태워서 죽이는 다소 엉뚱한 모양새를 띤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가 보기에 이 마임이 말라르메의 관심을 끈 것은 마임이 곧 말라르메가 예민하게 다루는 언어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간질어서 죽인다는 것 자체가 허구이며, 더군다나 자신이 자신을 간질어서 죽인다는 것 역시 모순인 것이다. 이 마임에서 피에로가 자신을 스스로 간질어서 죽이기 때문에 오히려 죽이는 자신과 죽이려는 대상(결국은 자신)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임에서 살인은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는 결코 봉합될 수 없는 자신 속에 내재한 간극을 지니기 때문이다.

뒤샹의 <큰 유리>는 바로 애초에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의 내부적 간극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독립된 커다란 두 개의 유리 패널로 이루어져있다. 부제인 <그녀의 총각들에 의해서 벌거벗겨진 신부, 심지어>(La Mariée mise à nu par ses célibataires, même, 1915-23)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화면의 윗부분은 신부를 나타내고 아랫부분은 그녀의 아홉 총각을 나타낸다.

아랫부분의 깔때기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신부의 영역인 윗부분과 총각의 영역인 아랫부분의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심연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따로 떨어진 독립적 인격체들 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인격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즈 셀라비(Rose Sélavy)라는 가명을 사용한 뒤샹의 초상사진은 한 인격체에 내재한 이러한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만 레이가 찍은 뒤샹의 사진에서 뒤샹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의 제목은 물론 뒤샹 자신의 가명인 여성 이름 로즈 셀라비이다.

이때 셀라비는 셀라비(C‘est la vie,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문장과 동일한 발음의 단어이다. 뒤샹의 사진은 그 자신의 말대로 정체성 자체를 뒤흔들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의미는 보통의 언어처럼 어떤 분명한 개념이나 지시대상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도 아니며 여성도 아닌, 하나의 인격체에 내재한 심연과 같은 간극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말하자면 어떠한 고정된 의미도 지니지 않는 의미,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사실상 이러한 내면의 간극은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며, 어떠한 기호도 이러한 간극을 완전히 봉합할 수 없다. 이렇게 보자면 언어가 내면의 간극을 극복하고 인간들 사이에 가교를 형성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말라르메가 순수시에서 소통의 불가능성을 발견하였듯이 뒤샹 또한 내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통해서 소통의 불가능성을 보고 그 한계를 작품으로 구현하였다.

1-뒤샹 ‘큰 유리’
2, 3-이자와 코타 ‘레논, 손탁, 보이스’
1-뒤샹 '큰 유리'
2, 3-이자와 코타 '레논, 손탁, 보이스'

이러한 원초적인 소통의 불가능성은 미디어아트의 경우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굴레이다. 얼핏 미디어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므로, 미디어아트는 기존의 예술이 감당할 수 없었던 소통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니 이는 극히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매체이론가 노버트 볼츠(Norbert Bolz)는 매체가 의사소통을 완성시키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다.

인간의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블랙박스처럼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은 어떤 단어를 통해서 서로가 똑같은 느끼고 똑같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음으로서 서로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다. 볼츠가 보기에 과거의 인쇄매체는 이러한 착각을 부추겼지만, 오늘날의 매체들은 이러한 소통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말하자면 새로운 매체는 과거의 매체보다 더 훌륭한 의사소통 도구가 결코 아니다. 새로운 매체는 소통이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내포하고 있다는 각성을 통해서 소통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다소 진부한 감도 없지 않지만, 일본 작가 이자와 코타의 작품 <레논, 손탁, 보이스>(2004)는 매체에 의한 소통에도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가의 작품은 2008년 서울 국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에서 전시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세 개의 비디오로 이루어진 이른 바 멀티채널 비디오 예술작품이다. 세 개의 비디오에는 각각 존 레논, 수잔 손탁, 요셉 보이스의 모습이 담겨져 있으며, 이들은 동시에 현대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이 세 명의 인물이 모두 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 혹은 예술 이론가라는 점에서 이들의 모습 자체가 현대예술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비디오 채널에 등장하는 세 인물의 모습은 실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그래픽 이미지 혹은 카메라의 필터링 이미지에 가까운 이들 등장인물이 동시에 떠들어댐으로서 관객들은 이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다. 사실 이들의 말을 제대로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 간에 바로 이런 점에서 이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난해한 현대예술 작품을 풍자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 인물에게 애초에 소통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 자체도 안중에 없는 듯하다.

이들이 내뱉는 말은 서로 섞임으로써 오히려 모두 하나의 공허한 음들로 파편화시키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낸다. 비디오 매체를 통해서 소통을 위한 기호들은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기호들로 둔갑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지 현대작품의 난해함이나 그 속에 내재한 무의미만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백남준의 순진할 정도로 낙관적인 믿음을 배신하고 매체가 지닌 원초적인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진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미디어 자체에 관한 작품인 것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