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 프로젝트황석영·서용선·안규철 분단과 갈등의 상징에 3人 3色 결과물 공개전세계로 보낸 1000개 '장벽' 모아 11월9일 독일서 '도미노' 이벤트도

"그리고 눈앞에 거대한 회색의 벽이 나타났어요. 깨어진 세멘트의 틈바구니에는 먼지가 쌓여 기적 같은 토양이 생겨나고 작은 풀꽃이 자라나 있었어요. 그때 나는 눈물이 핑 돌면서 실로 오랜만에 당신을 생각했습니다.(중략)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소설 <오래된 정원>의 주인공 한윤희는 독일 유학 중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현장을 마주한다. 그때 그곳에서 그녀가 연인 오현우에게 속으로 건넨 이 인사는 곧 암울했던 한국현대사에 대한 배웅이었을텐데, 20년이 지나도록 배웅은 아직도 배웅이 되지 못했다. 독일에서 보내온 대형 스티로폼 '장벽'은 소설가 황석영에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 평화가 올줄 알았는데 세상은 아직 분쟁의 연속"임을 새삼 일깨웠다. 황석영은 한윤희의 인사를 다시 꺼내들었다. 흰 벽에 목탄으로 눌러썼다. 생전 처음 갖는 희망처럼, 어린 아이 같은 필체에 강한 의지를 담아.

올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89년 냉전의 굳건한 상징이 사라지는 장관은 한 세대에게 역사의 진보를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 다음 세대는 이 꿈 같은 과거를 어떻게 물려받을 수 있을까?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 프로젝트 조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하엘 야이스만 조직위원장의 말처럼 "베를린 장벽을 단지 냉전 시대의 장벽일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의미하는 장벽의 상징"으로 재성찰하려는 취지다. "우리는 단지 축제를 여는 데 그치지 않고 뭔가를 배워야 한다."

베를린 장벽을 본뜬 1000개의 스티로폼 패널이 제작되었다. 전 세계 곳곳에 보내졌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예멘, 팔레스타인 등 분쟁 지역이 우선순위였다. 각국의 예술가, 학교, 평화와 자유의 후원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 패널을 채우면 그것들을 다시 모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일인 11월9일 브란덴부르크문 광장에서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는 이벤트를 연다.

한국의 몫인 3개의 패널은 각각 소설가 황석영, 화가 서용선, 조각가 안규철이 맡았다. 주한독일문화원과 함께 이들을 선정한 국립현대미술관 최은주 작품보존관리실장은 "분단과 통일, 한국의 현실에 천착해 온 작가들"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지난달 28일 서울 남산 주한독일문화원에서 그 결과물이 공개되었다.

화가 서용선의 '장벽'에서는 남북 경비병들이 등을 맞대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경계이자 최전선을 그곳을 지키는 사람으로 표현해낸 것. 서용선은 이 프로젝트를 제의 받았을 때 "국경을 넘나들 때 느끼는 감시의 시선"을 떠올렸다. 근대 자체가 국가를 기본단위로 구성되어 왔음을 상기할 때 이는 비단 한국사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외국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을 때 느끼는 심리적 위축감도 그런 감시의 결과"다. 서용선은 자신이 그려낸 이 첨예한 경계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질없이 쓰러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 비로소 작품은 완성될 것이다.

한편 안규철의 장벽에서는 이미 그것을 허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등장인물'들이 각각 꾀를 냈다. 누군가는 삽질을 하고, 누군가는 드릴을 가져 왔다. 좀더 평화롭게 벽을 넘으려는 이는 자전거와 스케이트 보드 타기를 연습하거나 차라리 계단을 만든다. 벽 앞에서 꽃을 든 손길이 있고 나무를 심는 마음이 있다. 힘뿐 아니라 감수성과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한 인물은 책을 읽고 있다. 그 기본은 벽이면서도 의지로 열 수 있고, 다른 차원으로 통할 수 있는 '문'이라는 오브제에 천착해온 안규철의 작품답다.

안규철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 우리에게도 저런 날이 오리라 기대했지만 아직도 언제 실현될지 애매한 상황"이라며 이번 프로젝트가 "무디어져 버렸던 장벽의 문제를 돌이킬 기회"라고 말했다. 그의 장벽 뒷면에는 '콘크리트', '철조망', '무장군인', '감시탑', '소총', '철책' 등 장벽의 다양한 요소들이 독일어로 쓰여 있다. 문을 내려는 시도들 이면에 이런 역사의 비극이 면면히 버티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듯. 낯선 언어의 이 단어들이 우리에겐 왜 이리도 익숙한가.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