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젠탈·브래들리·틸버리스·에모트 뛰어난 역량발휘 매체의 역사 새로써

1-패션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오른쪽)와 시에나 밀러 2-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칼 번스타인(좌에서 두번 째), 밥 우드워드(좌에서 세번째)와 함께한 편집장 벤 브래들리(맨 오른쪽) (사진제공: 프레시안 북) 3-워싱턴 포스트> 전 편집장 벤 브래들리 4-에이브러햄 로젠탈 전 <뉴욕 타임스> 편집장
1-패션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오른쪽)와 시에나 밀러
2-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한 칼 번스타인(좌에서 두번 째), 밥 우드워드(좌에서 세번째)와 함께한 편집장 벤 브래들리(맨 오른쪽) (사진제공: 프레시안 북)
3-워싱턴 포스트> 전 편집장 벤 브래들리
4-에이브러햄 로젠탈 전 <뉴욕 타임스> 편집장
지난 8월 30일 미국 유력 주간지 <뉴요커>의 편집장에 26세 여성이 발탁돼 화제가 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새 편집장 아멜리아 레스터는 시드니의 노스시드니걸스하이스쿨을 졸업한 뒤 시드니의 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와 함께 패션지 <보그>의 미국 편집장 안나 윈투어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9월호>(The September Issue)가 지난 8월 28일 뉴욕 선(先) 공개 후 뜨거운 반응을 얻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영화는 지난 1월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은데 이어 패션 중심지 뉴욕에서 총 6개관 규모로 먼저 공개된 첫 주, 주말 동안 24만 여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두 뉴스의 주제는 단연 편집장 그 자체다. 현대의 역사가 매스미디어에 의해 쓰여진다면, 편집장은 매스미디어의 역사를 써왔던 인물이다.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기자라면 기자와 기사를 조율하고 매체전략을 총괄하는 편집장의 역량에 따라 매스미디어의 역사는 바뀐다. 매체의 역사를 새로 쓴 전설의 편집장을 소개한다.

오늘의 뉴욕타임스를 만든 이, 에이브러햄 로젠탈

에이브러햄 로젠탈(Abraham Rosenthal, 1922~2006)은 <뉴욕타임스>를 오늘날 세계적 권위지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3년 대학생 통신원으로 뉴욕타임스와 인연을 맺은 그는 이듬해 정식 입사했고 19년간 특파원 등으로 활약했다. 로젠탈은 1959년 공산권군사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폴란드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해 추방당했는데, 이듬해 이 기사로 1960년 국제보도부문 퓰리처상과 폴크상을 수상했다. 이후 편집자(Editor)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69년부터 1986년까지 17년간 편집국장(Managing Editor), 편집인(Executive Editor)으로 신문제작과 경영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편집장으로 이름을 알린 건 1971년 뉴욕타임스 역사에 기념비가 된 '펜타곤 페이퍼' 폭로를 주도하면서다. 7000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에 깊숙이 관여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로젠탈은 미국 정부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문서를 반드시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발행인 아서 옥스 설즈버거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도 결정을 내렸다. 뉴욕타임스는 10명의 민완기자와 에디터들이 3개월 동안 매달린 끝에 10여 꼭지의 기사를 보도했다.

로젠탈은 매체 경영 능력도 탁월했다. 1960년대 말 미국 신문 시장은 TV시대를 앞두고 조만간 몰락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 역시 무미건조하다는 혹평에 시달렸고, 판매와 광고수입이 줄어 경영난에 빠져있었다. 로젠탈은 혁신적이고 과감한 지면 개편으로 변신을 이끌었다. 섹션을 과감히 늘리고 요리, 패션 등 문화, 라이프 기사를 대폭 늘리고 문체 혁명을 주도했다.

뉴욕타임스매거진을 별책부록으로 추가하는 등 일요판도 완전히 틀을 바꿨다. 잘못된 보도를 바로잡는 '정정 기사'도 로젠탈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절 뉴욕타임스가 만든 것이다. "신문을 확장하려면 좀더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면서도 신문의 성격은 지켜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워터게이트의 숨은 공로자, 벤 브래들리

오늘날의 뉴욕타임스를 만든 편집장이 로젠탈이라면, 오늘날의 <워싱턴포스트>를 만든 이는 단연 벤 브래들리(Ben Bradlee, 현 워싱턴 포스트 부사장, 1921~)다. 그는 로젠탈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경쟁자였다.

<뉴햄프셔 선데이 뉴스>기자, 파리 주재 미국대사관 공보관, <뉴스위크>기자를 거쳐 워싱턴 포스트에 입사한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인(Executive Editor)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언론으로 발전했다.

1971년 6월13일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폭로한 초대형 특종을 했을 때, 뉴욕타임스 기사를 베껴 쓰던 당시를 브래들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경쟁지 기사를 베껴 쓰는 창피스런 입장이었다. 우리는 문단을 바꿀 때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눈에만 보이는 피가 흘렀다."(<워싱턴 포스트 만들기>원제; A GOOD LIFE: Newspapering and Other Adventures, 259쪽)

이 사건 보도로 뉴욕타임스가 법무부와 공방을 하는 동안, 워싱턴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했고, 이 보도를 계기로 워싱턴포스트의 사풍은 바뀌었다. 정부 지원과 광고에 의존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보도국의 자율화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한 것. 세계적인 특종, 워터게이트 보도도 이때의 경험이 토대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워터게이트의 스타가 담당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들이 기사를 쓰는 환경을 제공한 사람은 벤 브랜들리였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로 닉슨 행정부와 2년 반 동안 싸웠으며, 자사 기자를 포함해 취재관련자40명을 감옥에 보냈다. 그는 몇 해 전 국내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닉슨 대통령은 매일 워싱턴포스트를 비난했다. 닉슨 정부는 포스트지가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를 지지한다고 비난했고, 포스트지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나쁜 신문인가를 전국적으로 연설하고 다녔다. (…) 그는 미국 국세청(IRS)이 자신의 적을 조사하는지를 확인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이고 회사고, 세금신고를 아주 신중히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철저한 사건추적으로 조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 영역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편집국장 재임 중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언론인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만 18 차례에 이른다.

5-이코노미스트 전 편집장 빌 에모트 6-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함께 있는 리즈 틸버리스 7-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전 편집장 리즈 틸버리스
5-이코노미스트 전 편집장 빌 에모트
6-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함께 있는 리즈 틸버리스
7-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전 편집장 리즈 틸버리스
패션지의 여왕, 리즈 틸버리스

패션지 편집장으로 도도한 안나 윈투어만 떠올린다면, 이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보라. 리즈 틸버리스(Liz Tiberis, 1947~1999)는 다이애나 왕세자비 패션 자문가이자 영국판 <보그>, 미국판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을 역임한 '패션계의 전설'이다. 그는 1969년 제이콥 그레이모아트 컬리지에서 프리 디플로마 코스를 다니던 중 패션지 보그의 '재능선발대회'에 응모했다가 차점자로 선발되어 보그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패션저널리스트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1984년 영국판 보그의 패션에디터가 됐는데, 1986년 안나 윈투어가 영국판 보그의 편집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를 상사로 처음 대면하게 된다. 이후 1987년 영국 보그의 편집장이 된 그는 1991년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잡지 표지 모델로 세우는 등 혁신적인 편집을 선보였다.

그는 이전 패션 잡지들이 선보였던 '마약같은 느낌'의 화보("원초적이면서 세련되고, 최첨단이면서 거칠고 겉치레를 벗어버린 모델과 사진 스타일", <리즈 틸버리스가 만난 패션 천재들>, 265쪽))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시크한 화보와 패션 기획으로 전세계 패션 유행을 선도했다. 패션 잡지가 여성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옐로 페이퍼'란 지적에 이렇게 대항하며 잡지의 위상을 높였다.

"잡지에서 정교하면서도 매우 값비싼 옷들을 보는 것은 마치 미술관에서 회화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미술관의 미술품들을 꼭 집으로 갖고 와서 소유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과 재능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패션의 실제뿐만 아니라 꿈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리즈 틸버리스가 만난 패션 천재들>, 1999, 267쪽)

이후 1992년 미국판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에 부임하며 틸버리스는 옛 자신의 상사이자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같은 해 하퍼스 바자 125주년 기념호를 만들며 정식 편집장으로 데뷔한 그는 이 잡지로 내셔널 매거진 어워즈를 수상했다. 그가 하퍼스 바자 편집장에 부임해 난소암으로 사망하기까지 2년 동안, 하퍼스 바자는 잡지 업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엘리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며 최고의 잡지로 인정받았다.

경제 잡지의 전설, 빌 에모트

앞의 세 명의 인물이 신문과 잡지의 황금시대를 살았던 전설의 편집장이라면, 빌 에모트(Bill Emott, 1956~)는 여전히 활동 중인 경제계 거물이다. 물론 그도 매체 일선에 벗어나 칼럼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지만 말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전 편집장 빌 에모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 철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1982년 이코노미스트에 입사, 일본 특파원과 금융, 경제담당 편집자(Editor)을 거쳐 37살에 편집장(Editor-in-Chief)이 된 그는1993년부터 2006년까지 13년간 전 분야를 총괄했다.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한 건 일본 경제에 관한 예언이 적중하면서부터다. 그는 거품경제 절정기인 1989년 일본 경제의 몰락을 예언했다. 지난 1990년 저서 <해는 다시 진다(The sun also sets)>에서 일본 경제의 성장이 과도하고 심각한 구조적 허점을 안고 있어 조만간 일본 경제가 몰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탁월한 분석력과 글 솜씨를 자랑하는 그는 1999년 9월, 20세기를 정리하고 21세기를 조망하는 '자유의 행로'(Freedom's Journey)란 제목의 칼럼을 게재,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15년 지난 2005년 10월 에모트 편집장은 '해는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란 기사에서 "일본의 활력이 살아나고 있다"며 낙관론으로 입장을 바꿨다.

에모트가 편집장에 오른 이후 이코노미스트의 주간 발행부수는 106만부로 두 배로 늘었고, 미국 판매 부수만 50만부에 달하는 등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분명한 의견과 기자 이름을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에모트는 이코노미스트 성장 비결에 대해 "영국 기사에 덜 집중하고 보다 화려한 잡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설의 편집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들은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종이 매체가 사양산업이라고 생각한다면, 몇 해 전 국내 인터뷰를 가진 벤 브랜들리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나는 이 업종에 50년 이상 종사해왔다. 언론에 대한 인기는 순환적이다. 때로는 올라가고, 때로는 내려가기도 한다. 언론의 역할은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진실을 알아내 밝히는 것이다. (…)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의 남편인 필립 그레이엄(Philip Graham)은 '신문이란 역사의 초고(First rough draft of history)'라고 말했다. 기사는 역사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아는 진실이다."

참조 :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프레시안 북 펴냄), <리즈 틸버리스가 만난 패션천재들>(씨엔씨미디어 펴냄)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