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 가공 거치지 않은 친환경 가죽… 빈티지한 멋 유행 예감

베지터블 가죽으로 만든 베스트와 울 니트, 저지팬츠·부츠 모두 구호 제품.
한동안 초식남 열풍이었다. 여자로서 여자에 관심 끈 초식남은 한탄스럽지만 환경을 위한 '초식 가죽'은 두 팔 벌려 환영이다.

가죽은 태생상 친환경적이기가 어렵다. 동물의 생명을 담보로 얻어지는 이 원단은 그러나 수많은 디자이너들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곤 했다. 특히 올해 초 열린 09 추동 패션위크는 그 어느 때보다 가죽의 향연이었다.

검은 가죽으로 만든 싸이하이 부츠(thigh-high boot: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와 어깨가 팽팽한 재킷은 지금 절정에 오른 80년대 파워 우먼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동물 보호를 위해 최대한 가죽 사용을 자제한다는 디자이너 서상영도 "가끔은 가죽의 매력을 대체할 수 있는 원단이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곤 해요."라고 말할 정도. 예쁜 게 죄라고, 내구성과 보온성, 외관의 독특한 매력까지 갖춘 이 마성의 원단을 외면할 수 없다면 조금 다른 방법으로 환경에 일조할 수는 있다.

가죽에도 식물성이 있다고?

동물로부터 분리된 모든 가죽은 반드시 가공을 거쳐야 한다. 시체를 가만히 두면 썩듯이 가죽도 부패한다. 피부에서 피혁으로, 즉 상온에서도 변질되지 않는 상품성을 지니기 위한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을 무두질이라고 한다.

썩기 쉬운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층 등을 제거해 냄새를 없애고 보존성을 높이는 작업으로, 소설 <향수>에서는 주인공 그르누이가 악덕 무두장이 아래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병에 걸려 죽을 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무두장이가 거친 직업인 이유 중 하나가 위험 물질을 다루기 때문인데 그 중 많이 사용되는 것이 중금속의 일종인 크롬이다. 현재 전세계 태너리(tanneries: 가죽 염색 공장)의 약 80%가 크롬으로 가죽을 가공하고 있다. 120년 전 크롬을 이용한 가공 방식이 처음 발명됐을 때 가죽 업계는 거의 신세계가 열린 것처럼 기뻐했다.

시간과 인건비가 혁신적으로 줄어든데다가 가볍고 강하고 균일한 색상의 가죽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세기가 흘러간 지금 패션 업계는 이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을 버리고 좀 더 자연친화적인 가공법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물론 1차적인 이유는 정부의 규제다. 가죽 가공의 본토인 유럽에서는 크롬 가공을 하는 업체에게 세금 부과 등 불이익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런 식의 규제는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차적인 이유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패션 하우스들의 사회적 양심이고 마지막 이유가 트렌드다.

친환경적 가공이란 크롬 대신 탄닌이라는 식물성 성분을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인건비가 늘어나는 것뿐 아니라 결과물에서도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식물성 성분을 이용했다고 해서 베지터블 가죽으로 불리는 이것은 나파 가죽(크롬 가공을 거친 가죽)과 달리 새 옷이라고 해도 매끈한 맛이 없고 오래 입어 닳은 듯한 느낌이 특징이다.

이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게 하는 요인으로, 청바지도 찢어 입고 스테이크도 숙성시켜 먹는 서구인들은 빈티지 풍으로 여겨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나 국내에서는 '낡은' 것으로 여기기 일쑤다. 게다가 만질 때마다 어김 없이 손자국이나 흠집이 생기고 자연광, 인공광 등에 의해 곧잘 변색돼 버리는 바람에 좋다고 사간 손님도 불량이라며 반품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 국내에서는 베지터블 가죽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크롬을 이용한 나파 가죽보다 10~20% 정도 단가가 높은 것과 소비자들이 아직까지 패션을 통한 환경 보호에 큰 관심이 없는 것도 이유다.

낡아도 좋다! 베지터블 가죽의 매력

구호는 이번 시즌 딱 한 스타일의 베지터블 가죽 아이템을 선보였다. 주목적은 친환경이었으나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완판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내년에는 100% 프리 크롬(free-chrome) 가죽 출시를 고려하고 있어요. 지금보다 더 소비자들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죠."

100% 프리 크롬이란 가공은 물론이고 염색 과정에서도 크롬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짙은 색으로 가죽을 염색할수록 환경 오염은 더 심해지는데 염색을 하지 않을 경우 가죽은 탈모 직후와 거의 비슷한 색을 띠게 된다. 한 마디로 자연 그대로의 가죽인 셈이다.

사용한 탄닌의 종류에 따라 살짝 색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아이보리처럼 옅은 색이 나올 경우 백화점의 할로겐 등에 노출되는 즉시 변색될 위험이 있다. 소비자들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친환경 패션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베지터블 가죽은 외관상 약해 보이는 것뿐이지 사실 잡아당기는 등의 내구성 실험에서는 나파 가죽보다 뛰어난 강도를 보이는 질 좋은 가죽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쥐어봐도 탱탱하면서 부드럽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좋은 것을 먹고 자란 만큼 건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베지터블 가죽 확대에 힘을 실어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국내 소비자들이 빈티지 패션을 받아 들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인식스뉴욕이 베지터블 가죽을 사용한 라이더 점퍼를 내놓은 데 이어 일부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에서는 베지터블 '풍'의 가죽 재킷을 선보이고 있다.

실제로 식물성 가공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낡아 보이는 외관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추가 가공을 한 것이다. "왜 헌 옷을 입고 다니냐"는 어르신들의 빈축일랑 한 귀로 흘려 버리고 '닳음'의 미학을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허리 라인을 한껏 치켜 올리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지금의 트렌드는 올 가을 정점을 찍은 후 한 풀 꺾일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내년부터 내추럴 무드가 회귀해 '다듬어 지지 않은, 만져지지 않은' 스타일과 옅고 부드러운 색상이 거리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살벌한 킬 힐은 유순한 플랫 슈즈로 대체되고 어깨는 축 늘어지며 허리 라인은 아예 없어지거나 원래 위치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당연히 가죽을 입는 방법도 변해야 한다. 태어나서 처음 가죽 재킷을 산 사람처럼 잔뜩 힘을 주고 성장(盛粧)하는 것보다 늘 입어온 것처럼 무심하게 걸치듯이 입는 것이 멋지다. 물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마치 오랜 세월 함께 한 친구처럼 흔적이 잔뜩 묻은 베지터블 가죽이다.

도움말: 구호 지민주 디자이너

나인식스 뉴욕 박인실 MD, 세양통상 김광용 대표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