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예술의 전당·세종문화회관 대관 등 수익사업 열 올려

지난달 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린 창극 <적벽>은 큰 공간에서나 연습이 가능한 대형 공연이었다. 그러나 국립창극단이 연습실이 아닌 공연장에서 리허설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뿐이었다. 대관 공연으로 스케줄이 꽉 차 있어 틈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날은 리허설을 한 뒤, 이틀째는 무대 장비를 설치했고, 3일째 되는 날 공연에 들어갔다. 연습에 최소 3~4일, 장비 설치에 3일, 총 일주일 정도는 필요한 대작 공연 준비를 단 이틀 만에 마친 셈이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대관 위주의 공연장 스케줄로 자체 공연 연습 시간을 너무 못 주다 보니 배우도 힘들고, 스태프도 힘든 상황"이라며 "일부 극단 법인화와 국·공립 예술기관의 수익성 강조로 자체 공연도 작품성보다는 티켓을 얼마나 파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공연장이 수익 논리를 앞세워 국·공립 공연단에 자리를 제대로 내주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국·공립 기관의 수익성을 강조하는 법인화의 후폭풍 현상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명박 정부가 산하기관장 업무평가에 있어 수익성을 강조함에 따라 국·공립 공연장의 공공성은 더욱 위협받을 것으로 보인다.

▲ 국·공립공연장서 공연 못하는 국·공립공연단

본지 취재 결과 국·공립 공연단이 자체 공연장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립 무용단과 창극단은 2008년 국립극장(4개 공연장)에서 단 1번(공연 각각 4회, 6회) 정기공연을 가졌다. 기획공연은 각각 3번이었다. 국립 국악관현악단 2번(2회), 극단도 2번(18회) 정기공연에 그쳤다. 기획공연은 각각 6번, 3번이었다.

올해 자체 공연 횟수가 다소 늘어나긴 했지만 큰 폭의 변화는 없었다. 올 1월부터 9월까지 국립극단은 국립극장에서 단 2번 공연했으며, 무용단 6번, 창극단 9번, 국악관현악단은 13번 공연에 그쳤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인 예술의 전당(5개 공연장)도 국립 공연단에 자리를 내주는 횟수가 미미하다. 올해 국립오페라단은 예술의 전당에서 5번, 국립발레단과 합창단은 8번 공연한다. 예술의 전당 상주 민간단체인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예술의 전당에서 올해 총 7번 공연이 잡혀 있다.

서울시 산하인 세종문화회관(4개 공연장)도 서울시 국악관현악단을 비롯한 9개 공립예술단에게 무대를 허용하는 횟수가 제한적이다. 서울시 오페라단은 올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단 2번(봄, 가을) 정기공연을 열었으며 대부분은 야외 공연(찾아가는 공연)을 하고 있다.

▲ 높아가는 대관 비율, 침해 받는 공공성. 공연의 질은?

이들 공연장은 국·공립 공연단에 자리를 내주는 대신 대관이나 임대, 주차료 등을 통한 수익 사업에 신경을 쓴다. 국·공립 공연장의 취지인 공공성이 상업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국회 송훈석 의원(무소속)에 따르면 올해 7월까지 예술의 전당 전체 공연 가운데 자체 기획 공연 비율은 7.88%에 불과하다. 예술의 전당의 최근 4년간 평균 자체 기획 공연 비율은 18.5%에 그쳤으며, 대관 공연 취소 횟수는 올 상반기만 50회에 이른다.

국립극장 해오름·달오름 극장의 대관율도 60%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극장 2009년 세입예산안에 따르면 대관수입, 주차장 운영비, 판매수입 등 기타 잡수입 항목만 35억 9200만여 원에 이른다. 2008년 국립극장 운영실적 보고서는 요금을 1000원 인상해 주차 수입을 5.6% 올린 것과 공연용품 등 대여를 통해 68.3%의 수입 증대를 낸 것을 성과로 내세웠다.

세종문화회관도 공공예술 공연보다 대관과 수익 사업에 신경을 쓴다. 홈페이지에 공개된 세종문화회관 2009년 예산안에 잡힌 올해 대관 수입은 36억 3400만여 원, 임대 수입은 23억 1400만여 원으로 정기공연(27억 4000만여 원)과 기획공연(21억 6700만여 원) 수입액을 상회한다.

▲ 걷은 돈 어디다 쓰나?

국·공립 공연장의 재정 자립도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수익성을 강조하며 공연의 공공성을 포기하고 얻은 수익이 제대로 쓰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문화부 자체 감사 결과에 의하면 예술의 전당은 2007년 말 감사원이 시간외근무수당 지급 중지를 요구했으나 2008년에 또 지급해 물의를 일으켰다. 예술의 전당은 총 16명의 고위급 직원에게 1억 5667만여 원을 지급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김부겸 의원(민주당)은 문화부가 자체감사를 통해 예술의 전당 전·현직 경영인의 불법·탈법 및 부정비리를 확인하고서도 종합감사결과 보고서(2009.4)에서 이를 누락해 비리를 은폐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공연 자체의 질에도 대관 위주의 공연장 운영은 악영향을 준다. 한 국·공립공연장 관계자에 따르면 공공성 있는 순수예술 공연을 펼치려 해도 수익에 대한 압박 때문에 표를 파는 데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성이 우선되어야 할 국·공립 공연장에서 예술적 수준이 높은 작품보다는 잘 팔리는 공연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 행정형 지정 대안 아니라 기관장 평가 기준이 문제

국·공립 공연장 공연의 공공성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기관장에 대한 평가 기준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국립극장과 예술의 전당의 경우 책임운영기관인 문화부가 올해를 전후해서야 기업형에서 행정형으로 기관 성격을 바꾸어 대관 비율을 낮출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두 기관장을 각각 A, B, C 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하는 상급 기관은 기획재정부다. 손익 논리로 산하기관의 경영 효율성을 평가하는 기획재정부가 기관장 평가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이들 공공예술 기관의 기업화는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한 지속적인 감시 역시 요원한 상황이다. 서울시가 책임운영기관이자 기관장 평가기관인 세종문화회관의 경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다뤄야 할 대상이지만 여러 정치 현안에 밀려 제대로 감사를 받는 경우가 드물다. 문화예술기관으로서 회관의 공적 위치에 비해 감시 시스템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예술의 전당은 여러 비리 혐의에 대해 집중포화를 맞았지만 국립극장은 예외였다. 국립극장이 직접적인 피감 대상 기관으로 지정되지 않은 해였기 때문이다. 문화부 산하 기관은 격년 꼴로 국감의 피감 대상 기관으로 명시된다. 국립극장이나 예술의 전당이 공공예술 서비스에서 미치는 위상에 비춰봤을 때 이런 시스템은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 재정자립도 수준, 경영마인드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 있어야

국·공립 공연장 운영이 엇나가는 근본적 원인은 예산지원책에 있다. 국립극장의 경우 국가재정 지원이 80%대에 이르지만 예술의 전당은 정반대로 20% 수준이다. 예산 지원이 부족한 국?공립 공연장 경영의 상업화가 가속화하는 것이다.

반면, 국가가 만든 공연예술 공간의 공공성 유지를 위한 예산지원이 적절히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관장의 경영마인드 역시 국·공립 예술공연장 경영에서 재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예술의 전당은 재정 자립도가 80% 수준으로 사기업인지 공공예술기관인지 헷갈릴 정도다. 문화부는 이런 기관에 경영인 출신 사장(신홍순 전 LG상사 사장)을 임명해 경영 효율성을 더 높이겠다고 했다. 미국의 민간 순수예술 공연장조차 재정 자립도는 평균 60% 대다.

사장이 공석인 세종문화회관은 김주성 전 사장(전 코오롱 부회장. 현 국정원 기조실장) 시절 재정 자립도가 20%에서 30%선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김 전 사장은 대관에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해 운영기금이 모자란 순수예술 공연단에게 세종문화회관은 '그림의 떡'이 됐다. 이 공연장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던 유니버설 발레단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공연장을 전전한 이유다.

서울시는 공석인 세종문화회관 사장 자리에 다시 경영인 출신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회관의 공공성은 더욱 위축될 처지에 놓여 있다.

이용관 한국예술경영연구소 소장은 "국·공립 공연장 운영에 있어 효율성, 예술성, 공공성은 세 바퀴와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며 "국·공립 공연장의 경영 효율성 수준과 재정 자립도, 예산지원 수준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토론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